애프터 썬: 나를 옥죄이는 '우울'

딸의 시선으로 만난 그 시절 내 아빠의 우울

by 달달보름


2022년 개봉작 중 가장 마음을 울린 작품 중 하나인 영화 <애프터 썬>. 당시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팟캐스트 방송에서 선정되어 접하게 된 영화였다. 방송 준비하면서 보게 된 것 치고 (대충 집에서 집중 못하는 환경에서 봤다는 말)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영화 자체가 너무 좋아서 재개봉하자마자 극장에 달려갔던 기억도 난다. 이 영화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애석하게도 별로 반갑지 않은 감정인 '우울'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감정, 미장센, 이야기 모든 것이 우울이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한다. 2편에서 다루었던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슬픔은 잠깐의 기복이 있는 파도 같은 감정이라면 '우울'은 그냥 인생 전반의 기저에 깔려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하늘 같은 거랄까? 그런데 그 하늘이 맑지 않은.. 파도와 하늘은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영화가 되게 흐리고 어둡진 않다. 우울증이 있거나 우울에 빠져 있는 사람의 하루하루가 매일 어두운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매번 죽상을 하고 돌아다닐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일상생활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환자들이 그 시간을 살아내는 거라면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가는 중이라는 것. 그러니까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 경험에서 나온 당사자성 발언이다. 개인적인 경험이다 보니 이렇게 또 납작하게 표현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이 정도로만 비교하고 넘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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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X에서 어떤 우울증 환자로 추정되는 유저가 쓴 글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울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마치 구멍이 뚫린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그래서 평범한 하루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억들이 휘발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나도 우울증을 안고 살아갔던 기간 동안 도대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에 매몰되거나 미래를 불안해하며 현실에 깨어있지 못했던 나는 그래서 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술에 취하는 기분은 현재를 만들어 주니까.



영화는 딸과 함께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 부녀지간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아주 단조로운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틱한 사건도, 기억에 남을만한 에피소드도 특별히 발생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딸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비추고, 딸과 함께 춤을 추고 여행하는 아버지 캘럼의 모습은 겉보기엔 전혀 문제없어 보인다. 그걸 미묘하게 눈치챌 수 있는 건 관객이다. 딸 소피의 눈으로 멀찌감치 지켜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때, 그가 얼마나 외롭고 끈질긴 우울인지 영화를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단서들이 영화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우울의 조각조각을 모아 퍼즐을 맞추면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도 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감독 샬롯 웰스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주인공 소피와 캘럼의 이야기는 감독이 직접 겪은 일들로 재구성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버지를 잃은 감독 샬롯 웰스는 아마도 이 이야기로 아버지를 관조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그 시절의 캘럼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린 시절 소피가 볼 수 없었던 캘럼의 우울한 여백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구석구석 짧은 쇼트로 빠르게 은유된다. 책상 위에 놓인 태극권과 명상을 공부하는 듯한 도서들은 불안하게 표류하는 마음을 어떻게든 잡고 싶어 하는 캘럼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양치질을 하며 이유 없이 거울을 향해 침을 뱉는 모습은 정말 0.5초 정도 짧게 지나가는 쇼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마음에 많이 각인되는 장면이다. 우울을 앓았던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거울 속 비치는 내 모습이 싫을 때,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증오스러울 때, 우울은 그럴 때 불쑥 고개를 내미는데 그런 싫은 내 모습을 향해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 자기혐오가 아닐까. 어른이 된 소피는 이제 안다. 그때의 말 없던 아버지가, 이유 없이 화를 냈던 아버지가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는지. 호기심이 왕성한 사춘기 소녀의 복잡한 감정 속 어떻게 아버지를 외면하고 있었는지, 어른이 된 소피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울증은 정신의학 상담을 받고 약을 복용하는 것이 직접적인 치료 방법이지만 다른 가벼운 질환처럼 실생활에서 치료할 수 있는 보조적인 방법이 없다. 이는 일시적인 감정인 슬픔과 다르게 우울은 사회, 문화,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요인 그리고 각종 호르몬의 교란으로 이어지는 만성적인 질환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성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고, 그 괴로움에 술을 마시면서 우울이 더 깊어졌던 케이스였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도무지 '연결됨'을 느낄 수 없었고, 그것이 또 우울로 커져버리는 그런 경우. 이런 이유로 주변 사람들은 더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 싸인 핵인싸,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는 끈기 있는 사람, 남편도 있고 두 아이도 있고 워킹맘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돕는 시어머니도 있는 내가 대체 왜? 하는 물음표가 생길 수밖에.. 게다가 나는 매우 밝고 외향적인 성격이었기에 스스로도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지각하지 못했다. 심리상담을 받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산다는 사실을 치료를 받으며 깨달았다. 나는 보통의 사람들은 그래도 아주 가끔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게 기본 값인 줄 알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영화 속 캘럼이 베란다에 위태롭게 서 있을 때, 칠흑 같은 바닷물로 뛰어들 때, 그때 마음속에 어떤 돌덩이가 그를 그 자리까지 불렀는지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우울증을 겪고 난 뒤에 배운 점이 있다면 그런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 조차 깊은 우울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빨리 눈치 챈다는 것이랄까.



영화 속 소피와 캘럼이 신나게 흔들며 춤을 출 때 나오는 음악은 퀸의 'Under Pressure'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중압감에 짓눌린 우울증의 이야기를 아주 밝은 리듬으로 전달해 준다. 아마 우리 주변의 우울증 환자가 보통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해사해 보이는 리듬 속에 깊은 중압감에 시달리는..



일부 가사를 발췌했다.



Pressure pushing down on me

나를 누르는 중압감

Pressing down on you, no man ask for

당신을 누르는 중압감, 아무도 원치 않아

Under pressure that burns a building down

그것은 건물을 태우고

Splits a family in two

가족도 둘로 나뉘고

Puts people on streets

사람들을 거리로 내쫓네



영화 속 영상은 아래 링크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912Ntw7oYOg&list=RD912Ntw7oYOg&start_radio=1



어둠 속에서 춤추는 캘럼의 모습과 교차편집 된 이 장면은 캘럼의 '해방'과 '절규'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이 울었다. 캘럼을 어떻게든 위로하고 싶었다. 비록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때의 느꼈던 외로움을 조금씩 보듬어 주고 싶었다. 고생했다고. 잘 살았다고. 수고했다고. 우울에서 나를 꺼낼 수 있는 건 결국 타인이 아닌 나이다. 그때의 소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어른이 된 소피는 절대 캘럼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밝은 사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길 바란다. 우울증 환자들이 원하는 것 중 하나는 세상과 연결되었다는 따뜻한 감각이고, 수많은 원인 중 하나인 그 연결감이 그 사람을 살릴 수도 있으니. 캘럼의 하늘은 늘 흐렸지만, 소피의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빛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 각자의 하늘도 언젠가 다시 밝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서로의 안부를 살펴보면 어떨까.




1) 지금 당신 마음의 하늘은 어떤 색에 가까운가요?

2) 최근에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준 순간이 있었나요?

3) 당신 곁에 조용히 춤추고 있는 ‘캘럼’ 같은 사람은 없나요? 그 사람의 안부를 오늘 한 번 떠올려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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