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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Nov 01. 2017

New York Triology 폴 오스터와 긴 산책

feat: 비트겐슈타인과 헨리 데이빗 소로의 유령들

The New York Triology


    화창한 주말 오전과 오후 긴 산책 시간을 동반했던 것은 도시 감성을 자극하는 제목을 단 폴 오스터의 세 권의 중편을 묶은 소설이었다. 굳이 뉴욕이 무대일 필요는 없어 보이는, 탐정소설을 빙자해 난해한 언어 철학 이론들을 패러디한 판타지 소설에 가까왔으나, 소설 속 화자 역시 목적 없이 그리고 정해진 생각 없이 뉴욕의 거리를 걷는 일을 매우 좋아해 산책길의 즐거움을 꽤나 디테일하게 논하곤 했으므로 공감하는 대목이 많았고 흡입력 있는 소설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들으며- 느꼈던 흥미가 소설 자체가 가진 것이었던지, 아니면 산책을 좋아하는 소설 속 화자와 나의 행동이 싱크로 됨으로써 배가 된 흥미를 느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혼자 걷는 긴 산책길에 흥미로운 소설을 귀로 듣는 것은 꽤 괜찮은 취미다.   

  영리한 소설가 폴 오스터는 각각 200 페이지 정도에 달하는 세 편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소설을 관통해 몇 가지 진지한 모티브들을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엮어내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첫 번째 소설 <유리의 도시>에서는 20세기 천재의 대명사 비트겐슈타인을 패러디함으로써 언어의 타락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고민과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재할 방법을 모색하는 시도를 내보인다. 정체성의 문제와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언어의 타락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는 일이라는 두 가지 모티브가 이어지는 두 번째 소설 <유령들>에서는 블루, 블랙, 브라운이라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역시 비트켄슈타인의 저서 <The Blue and Brown Books>에서 따온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비트겐슈타인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남긴 공통의 행적에 주목한다. 이 두 명의 사상가는 공교롭게도 여름 이후 우연한 기회에 줄곧 내게 말을 건네 오던 사람들-유령들 인데, 우연히 집어 든 30년 전 소설 속에서 폴 오스터는 이들이 남긴 레거시에 기대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한 명의 철학자와 한 명의 사상가, 그리고 또 한 명의 소설가와 시간을 보내는 2017년의 가을은 참 무척이나 공교롭다.  

   

1. City of Glass 유리의 도시


<Philosophy is a battle against the bewitchment of our intelligence by means of language.>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What can be shown, cannot be said.>

<The human body is the best picture of the human soul.>

                                                                                                                          Ludwig Wittgenstein


세권 중 첫번째 소설인 유리의 도시에서는 피터 스틸맨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패러디 한다. 20세기 초반, 천재 철학자의 파랗게 벼려진 날카로운 지성은 정확한 의사소통과 언어 사용을 통해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을 숙제로 삼았다. 머릿속에 지닌 각자의 관념과 개념은 그림으로 그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 가지 관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결코 합의점에 다다를 수 없으므로 의사소통의 혼란은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언어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세계의 질서는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으므로 언어 역시 수학적 논리로 풀어낼 수 있다고 주창한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수학적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모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은 논리적 오류이므로, 인간들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며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야 한다 라고 젊은 철학자는 선언했고, 그의 극단적이고 전무후무한 세계관에 100년 전의 세상은 매혹당했다. 정확한 언어를 분석하고 사용함으로서 세상의 오류를 바로잡고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 철학의 의무임을 천명했던 철학자는 그러나 너무 젊었고, 너무 이상적이었다.


   결국 젊은 천재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언어의 절대값 그 자체의 순수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과 맥락, 사회적 울타리의 결정적 중요성, 심리학적 개념으로는 “게스탈트”적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초기 주장을 뒤집어 엎는다. 비트겐슈타인이 초기에 언어의 순수성이라는 과격한 논리철학을 펼 당시에는 그의 논리적 오류를 검증해 줄 수 있는 경험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태동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렇다하더라도 그가 영국과 노르웨이 사이를 방황하지 않고, 심리학의 요람이었고 또한 게스탈트 심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독일에 좀 더 일찍 정착을 했더라면 그의 논리전개는 괘를 완전히 달리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난해할 수도 심오할 수도 있는 천재의 철학 이론을, 그러나 폴 오스터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놀랍도록 평이한 문장을 사용하여 대중의 언어로, 지극히 대중적인 탐정소설을 빙자한 소설적 플롯으로 판타지에 가까운 형식으로 풀어낸다. 이 소설이 전설로 추앙받는 이유는, 철학적 심오함을 평이하고 대중에 어필할 수 있는 해석과 풍자로 엮어낸 데에 있지 않을까.


    유리의 도시에 등장하는 피터 스틸맨 시니어는 언어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에 나오는 역사를 바벨탑 건설 이전의 언어의 순수성을 유지했던 시기와 바벨탑 이후 타락한 시기로 나눈다. 인간의 극한 욕망의 결집체인 바벨탑은 도덕적 타락을 수반하고 도덕적 타락은 언어의 타락을 동반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언어를 바벨탑 이전의 신의 수수한 언어로 회복하고자 하는 실험을 시도한다. 그의 실험에서 희생되는 또 한명의 아베롱의 야생 어린이는 -언어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사회의 오염된 언어와 격리된 채 유년시절을 독방에 감금되어 지낸- 자신의 아들, 피터 스틸맨 쥬니어이다. 피터 스틸맨 시니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나이의 어린 아들을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의 언어로부터 격리시켜, "순수한 신의 언어를 회복하기 위해" 어둠 속에 감금하는 극단적인 실험을 수행하지만 실패하고, 노인이 된 피터 스틸맨 시니어는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언어를 매개로 한 세상에 대한 인식은 언어 자체의 구조와 실체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언어의 진정한 기능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갔던 비트겐슈타인을 비트는 이야기다. 그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1950년대에 사망하고 한 참이 지난 1980년대이니 가능할 수 있었던 후일담적 철학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1980년대이니 가능했던 소설적 전개였고 현재는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2. Ghosts 유령들


  성공이라는 세속적 잣대에 필요한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던 두 사람이 도덕적/언어적으로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행했던 시도는, 한시적 은둔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방식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태생으로 19세기 유럽의 철강왕의 아들이었던 그야말로 수퍼리치였으며 당대에 이미 천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캠브리지의 교수였던 비트겐슈타인은 홀연히 노르웨이의 외딴 바닷가 오두막으로, 그리고 미국 태생으로 연필공장 사장의 아들이었던 하버드 출신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의 외딴 호숫가 숲 속으로 무소유의 한시적 은둔을 실행했고 내면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소리를 치밀하게 기록하였다. 그들의 기록은  (Tractatus -비트겐슈타인,  Walden-헨리 데이빗 소로우) 세기의 사상으로 자리매김하며 많은 이들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폴 오스터는 그 두 사람의 치밀한 기록이 남긴 정신적 유산, 진정한 무소유의 은둔적 삶을 추구하고 내면으로 회귀하고자 했던 삶의 방식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이 세권의 중편 속에서 자기 방에 갇혀 강박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소설 속의 피터 스틸맨 주니어, 헨리 다크, 블루, 블랙, 폴 오스터, 팬쇼 등등의 이름으로 재탄생시킨다. 이들을 작가와 탐정이라는 여러 명의 인물들로 패러디해낼 뿐 아니라 그들의 언어 역시 패러디 하며, 소설 속에서 제시하는 모티브와 관련된 영미 문학사의 숱한 일화들을 멋들어지게 버무려 넣어, 독자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문학사 속의 인물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 안에 거하는 소설 속 자기의 분신들은 유령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는 나를 포함해서.


3. Locked Room 잠긴 방


<A man will be imprisoned in a room with a door that's unlocked and opens inwards; as long as it does not occur to him to pull rather than push.>

                                                                                                                                    Ludwig Wittgenstein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장광설에서 귀와 눈을 떼지 못하고 따라가다 보면 끊임없이 정체를 바꾸는 화자의 여러 정체성의 끄트머리에 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 역시 소설의 일부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발견할 때, 누군가가 갑자기 들이댄 거울을 보는듯한 기분이 되어 피식 웃게 되는 순간도 있다. 세 편의 중편을 관통해 이어지는 주제는 타락한 세상과 결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 존재의 우연성 (어쩌다 보니 내가 나로군)과 그 이면인 정체성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보이는데, 이 모든 것이 버무려져 종횡무진 전개되므로 냉정하게 보자면 정신분열적 판타지 소설로 보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을 비우고 생각해보면 "내가 너일 수도 있고, 네가 나일 수도 있군, 그럴 수도 있군."으로 귀착되는데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종국에,  그 책의 마지막 소설 <잠긴 방>이라는 제목 역시 비트겐슈타인의 인용으로, 우리는 안으로 당겨서 여는 열린 문을 밖으로 밀어버림으으로서 스스로를 방 안으로 가두어 버리는 소통불능의 존재들임을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정체성과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론들에 관한 장광설과 사설들은 쓰레기통에나 던져 넣어도 좋을 정신 나간 괘변일 수도 있음을 종언하며 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다.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임이 분명한 작가로군.


        


 워낙 전설적인 소설이라 뉴욕 3부작 원작의 pdf 파일이 여러가지 떠 있습니다. 아울러 비트겐슈타인의 첫번째 저서 <철학논고>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Walden> 의 원문 파일도 그렇군요.  


http://writing.upenn.edu/library/Wittgenstein-Tractatus.pdf


http://www.eldritchpress.org/walden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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