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미세먼지를 중국에 가두어 놓았다는 소식이 들린 지 며칠째.
문득 찾아온 가을 아침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함.
머리칼을 흩날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마음.
축복 같은 7월의 날씨다.
한낮엔 구름의 행진 사이로 잠시 잠깐 새파란 하늘의 속살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태풍이 한 달에 한 번씩 시계 반대방향으로 불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태풍을 생성하는 비밀 기술을 개발해서 중국을 향해 가동하여주면 좋겠다.
남한산성 대탐험의 날. 저녁 무렵에 남한 산성에 올랐다. 한 해에 한 번씩은 올라보는 남한산성이지만 한 나절에 네 개의 성문과 세 개의 사찰을 모두 둘러본 일은 없다. 저녁 식사를 위해서 똑같은 메뉴를 갖춘 식당을 세 곳이나 방문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부모님의 단골집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비슷비슷한 구조의 한옥들을 찾아다니느라....
산성의 초입에는 시내버스도 통행을 하고 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터널을 지나 남문을 향해 걷는 “누비길.” 좁고 해가 들지 않을 만큼 우거진 산길을 걸으면 축축하고 차가운 숲의 공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각종 수목이 뿜어내는 향기를 느끼며 열심히 걷다 먼 곳을 본다. 시가지에 닿기까지의 먼 거리에 대비해 보면 산의 높이와 깊이가 가늠이 된다. 성벽 아래는 아찔할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 매우 크고 높고 비탈진 산이다. 그 옛날 병자년의 인조 대왕이 그 추운 겨울에 홍타이지의 대군을 피해 숨어들었던 이 높은 산꼭대기. 숨어들어 지내기를 한 달여.... 쌀이 떨어지자 투항하여 산 아래로 내려와 이마를 찧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왜 쌀이 떨어지고 나서야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 났을까... 쌀이 떨어지기 두 달쯤 전에 미리 생각을 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전쟁이 나기 이년쯤 전에 미리 사방을 둘러보았더라면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 그때 청나라에 내어준 육십만 백성들을 지금의 후손들은 왜 기억하지 않는 것인가. 백 년 안의 가까운 역사는 기억해야 할 역사이고 먼 역사는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소설 “남한산성”을 읽은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지만 소설 속 홍타이지의 목소리를 빌어 김훈 선생이 인조와 그의 보좌진을 향해 던진 한마디는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다. “저 돌담 속에 들어앉아 어쩌자는 것인가.” 그 돌담이 현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산성 안에는 옛 마을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바야흐로 한국은 전국적인 역사 복원 토목 공사가 진행 중이다. 경복궁 재건에 남한 산성 재건.. 그리고 수원성도 엄청나게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
햇살이 들지 않는 우거진 숲 길을 열심히 걷다가 시야가 트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 우리가 사우론이라 부르는 롯데타워는 이 시간 이미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햇살 좋은 낮에 저 높은 건물이 빛을 반사하며 은빛으로 빛나는 위용은 통통한 뱃살을 자랑하는 미끈한 생선을 연상케 한다. 파란 하늘이 계속되어 준다면 수면을 향해 솟구치는 한 마리 꽁치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낮은 하늘과 평평한 구릉 사이에 놓인 하남시와 그 뒤로 흐르는 강은 아마도 한강이겠지. 도시에는 평온한 저녁이 부드러운 빛깔로 내리고 있을 시간. 산성 마을 구석구석으로 안내하는 도로들. 굽이치는 도로를 돌아들면 어디서건 나타나는 작은 물의 흐름과 계곡들. 올해는 서울 가까운 이곳에서 지리산을 발견한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 무언가를 꼼꼼히 체크하기도 하는 큰 아이를 지나치며 찍은 장면은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가 즐겨 사용하던 구도와 흡사하다. 뭉크의 머리 위로는 붉은 구름이 그리고 발아래는 암울한 피요르드 해안이 펼쳐졌으나 오늘 남한 산성의 성벽을 따라 걷는 내 아이가 연출하는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해마다 산성마을의 규모가 확장되고 있다. 동문을 향해 내려가는 길에는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붓을 씻었다던 연못이 복원되고 연못의 한가운데는 누각도 여유롭게 건설되어 있다. 첫 번째 방문한 산사의 마당에 가득하던 보랏빛 비비추. 그 아래에 주차되어 있던 생뚱맞은 빨간 루비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마크를 등 뒤에 달고 있다.
두 번째 방문한 호화로운 산사의 마당에서 평화롭게 순찰을 돌고 있던 새하얀 쌍둥이 백구는 어느새 나타나 우리를 따라다녔다. 조용하고 넓은 산사의 뜰을 마음 놓고 오르내리는 백구는 행복해 보인다. 산사를 지키기에 딱 어울리는 강아지다. 착한 강아지들..
내 사랑 피오니는 지고 없고... 꽃이 피었던 흔적은 견고히 가지 끝에 남아 피오니의 화려했을 한 때를 그려보게 한다. 치자꽃을 닮은 흰 장미가 계절을 알린다. 지난여름 속리산 법주사의 모든 정원에는 옅은 핑크빛 피오니가 만개해 있었다. 한반도엔 작년보다 여름이 더디 오는 듯하다. 작년 방문 땐 온 나라가 능소화 꽃밭이었으나 올해는 아직 고속도로를 여러 시간 달려도 만개한 능소화를 보지 못했다. 하물며 가을을 느끼게 하는 바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