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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ul 26. 2019

두 번째 맥북 프로 -일 잘하는 착한 조수

새로 배달된 15인치 맥북은 자판의 상단부에 터치패드가 있어 검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터치하면 로그인이 되고, 자판 상단에 function keys가 종전의 기능에 더해 검색창을 겸하는 가늘고 긴 터치패드 스크린으로 교체되어 있다. 단어의 자동완성 기능도 이 터치패드가 겸하고 있다. 아이폰의 기능과 맥북이 통합된 거다. 우선 눈에 띄는 그 차이점을 제외한다면 이 신형 랩탑은 이틀 전에 잠들어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는 구형 랩탑과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점이 없다. 아, 외형이 종전의 반짝이는 은색 대신 톤 다운된 그레이라는 점도 다르고, 색상 조절이 더 섬세하고 자연스럽다는 설명도 매뉴얼에 들어있긴 했다. 새 컴퓨터에 따라오기 마련인 매뉴얼은 종전처럼 얇은 책자가 아니라 엽서 크기의 종이 한 장이 전부다. 매뉴얼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부팅을 하자 6년 이상 사용한 맥북에 있던 모든 정보가 새 컴퓨터 화면에 고스란히 오차도 없이 떠오른다. 클라우드세계의 편리함이라니…. 랩탑은 실로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껍질에 (shell) 지나지 않는 것이고, 내 “컴퓨터”는 저 구름 위 어딘가에 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사막 어디쯤인가 설치된 시설에서 보호되고 있던가…

한글자판은 손가락 끝에 달려있어요

지난 겨울 누군가가 내 아이폰을 집어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져, 새 전화기를 받았을 때도, 상황은 같았다. 부팅을 하고 아이디를 입력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들이자 바탕화면의 그림이며 잃어버린 전화기에 들어 있던 모든 설정과 내용이 고스란히 새전화기에 전달되어서, 새전화기를 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전화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실은 목표 작업을 완수하리라 모처럼 마음먹었던 이틀 전, 컴퓨터가 잠에서 깨지 않아 당황스러웠을 때도 작업 중이던 모든 파일은 전화기에서 불러낼 수도 있었고, 아이패드에서 불러낼 수도 있었다. 모바일 기기들이라 편집 기능에 제한이 있고, 무엇보다도 그 작은 화면과 씨름하기 위해 눈을 혹사할 수가 없어 작업 중이던 파일이 구름 위 저 어딘가에 안전하게 저장되어 있다는 것만 확인해 두었다. 하지만 잠자는 컴퓨터를 고쳐서 사용할 수도 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단 이틀 만에 새벽같이 배달된 새 컴퓨터라니… 소비가 이렇게 빠르고 이렇게 쉬운 것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정보과학의 진보를 나 같은 사람이 따라잡기란 숨가쁜 일이고 다 알지는 못하지만, 클라우드 컴퓨팅 시스템의 기적같은 편리함 이면에는 두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하나는 내가 기록해둔 모든 내용들이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우려. 혹은 반대로 뜻하지 않은 어떤 비극적인 파괴가 일어난다면 한순간에 내 모든 자료가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염려.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지만, 클라우드의 비극적 파괴를 우려한다면, 디스크나 USB 조차 사용할 수 없도록 디자인된 이 기기들로부터 정보를 백업하는 방법은 모든 자료를 종이에 출력해두는 것 밖에는 없다. 내가 애써 삭제하지 않는 한, 심지어 내가 정보를 삭제를 하더라도 누군가는 되살릴 수 있기에, 나는 사라져도 내 흔적은 고스란히 존재할 것을 상상하면 마음이 편하진 않다. 내 오래된 친구들은 어쩜 그리 보수적인지, 자신의 통제 밖으로 벗어나는 자신의 흔적을 우려해 소셜 미디어에 접근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이긴 하다.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영국의 길버트 라일이 말했던 ghost in the  machine 또는 공각 기동대의 ghost in the shell의 수동적 구현이라 할 수도 있을 거다. 여기에서 한 단계 나아가 엘런 머스크가 구상 중인 뉴럴 링크가 정말로 현실화될 수 있다면, 먼 훗날 그 시기에 우리는 중대하고도 되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강요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가 막힌 두 번째의 우려는, 생활의 필수 불가결인 이 기기들을 한국에 들고 가는 경우에는 완전히 국외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맥 사용자가 그것도 한국 거주자가 아닌 경우에 한국에서 겪어야 하는 좌절은 상상 이상이다. 온라인을 이용한 은행은 물론 공공기관, 심지어는 온라인 서점조차 사이버 시큐리티를 위한 인증서라는 프로그램은 설치를 요구했고 - 이 광명한 세상에 서비스 기관이 개개 사용자들에게 보안의 책임을 전가하다니, 나쁘다- 보안 프로그램이 윈도우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맥과 아이폰에서는 그것의 설치조차 불가능하다. 그 결과, 만인을 위한 공공 서비스 기관은 홈페이지에 떠 있는 정보 한조각조차 맥북 사용자에게는 열람을 허락하지 않는 믿기지 않는 서러움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 시에는 윈도용 컴퓨터를!  모국어가 한반도에서만 사용되는 고립된 언어라는 이유로 한국의 포털은 가두리 양식장과 다름없고, 세상에 공개된 정보를 따라가면 국적의 선택마저 누구의 도움 없이 개인 선택으로 가능한 21세기에 온갖 이유를 들어 개인들의 발을 거는 한국은 IT쇄국.... 말하자면 정보 통신의 갈라파고스 섬이다. 관련한 공학기술이야 눈부시겠지만, 기술을 통제하는 쇄국정책이 문제겠지…


그래픽 작업에 최적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텍스트 작업에도 뛰어난 맥북의 가장 탁월한 기능은 역시나 영어와 한글로 정확하게 기록해주는 voice dictation과 텍스트를 읽어주는 speech 기능이다. 서류 작업에 손가락과 손목은 말할 수 없이 혹사당하는데, 보조장치 없이도 function key를 더블 클릭하면 어떤 프로그램 상에서도 보이스 딕테이션이 작동되는 기능은 saving grace다. 산책길에 생각이 떠오르면 역시 보이스 딕테이션 기능을 이용해 -자판에 있는 마이크 아이콘만 누르면 된다- 메모장에 노트해 두었다가 집에 돌아와 정리한다. 산책길에 아이폰에 음성으로 메모 해 둔 내용은 컴퓨터에서 고스란히 오픈할 수 있다. 그러니까 컴퓨터에 귀가 달려, 들은 것을 자동으로 받아 적는다. 컴퓨터의 귀가 내 발음에 적응이 되는 건지, 내 발음이 정확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장은 정교하게 입력된다. 느린 기계음이긴 하지만 텍스트를 들을만하게 읽어주는 스피치 기능은 깜찍한 조수다. 기사나 텍스트 읽다가 스피치 기능 켜놓고 잠시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내가 소소한 집안일을 하는 동안 이 맥북은 뉴요커에 실린 짧은 기사나 하루끼의 단편 하나 정도는 가볍게 읽어준다. 쓸만한 조수다. 어쨌거나, ergonomics를 최대한 구현하려는 맥북의 노력은 고맙고 사용자의 피로를 많이 경감시킨다. 하루에 열 시간 이상 문서작업을 해야 했던 그 시절에 이 깜찍한 조수를 알았더라면 인생이 훨씬 쉬웠을 텐데… 그때는 딕테이션 드래건이라는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지만 드래건은 내 발음을 잘 못 알아들어 도움이 안 됐다. 힘든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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