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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Aug 22. 2019

나는 그 전망대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봄날의 한국은 방방곡곡이 벚꽃으로 뒤덮인 거대한 벚꽃동산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벚꽃이 많았던가.... 아름답지만 생경스런 풍경이다. 아름답지만 생경스런 풍경이 주는 감흥을 채집하던 그 봄날. 어느 주말 오전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세상의 모든 목련이 한자리에 모여 만개한 현충원을 산책했다. 햇살이 맑았더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하늘은 살짝 흐려있다. 세상엔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목련이 있던 것인지 그날 알았다. 꽃을 떨어트린 가지 조차도 독특한 프랙탈을 엮어내고 있다. 거룩한 목련꽃그늘 아래 나란히 서신 부모님들의 사진을 몇 장 찍어드리고, 나는 일본 그림에서나 보던 것 같은 가지가 축축 늘어진 능수 벚꽃 아래서 사진을 한 장 찍는 것으로 오전의 산책은 끝이 났다. 능수버들에 푸른 잎사귀 대신 벚꽃을 달아놓은 듯한 그 나무는 낯선 수종이라 그랬던지 왠지 코믹한 데가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가까운 곳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버님이 지인들과 가끔 들리신다는 프랑스 마을의 그 레스토랑은 10여 년 전 내가 들렀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세월의 흔적을 드러냈다. 벽을 터서 실외의 작은 정원을 실내로 아우른 독특한 공간도  있어, 과거의 어디쯤으로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상상을 하자고 들면, 이곳은 프랑스의 소박하고 조그만 카페쯤 된다고 상상을 할 수도 있었다. 음식은 정성 들여 플레이팅을 했고, 차례차례 나오기를 기다리며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길어지는 식사에 적절한 대화의 소재를 찾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유쾌하게 식사를 마치신 아버님은 동작대교로 방향을 잡으셨다. 아버님은 전국의 모든 번화한 길과 눈에 띄지 않는 길의 지도와 그 길 위에 녹아있는 역사를 머릿속에 세기고 계신다. 그래서 아버님을 따라나서는 나들이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오후의 산책은 동작대교 위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곳에는 노을과 구름이라는 이름을 각각 가진 쌍둥이 전망대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다리 입구에 마련된 주차장에서 관리인에게 주차료를 지불하고, 나무로 된 보도를 걸어 전망대를 향했다. 다리 아래로 강변에 길게 놓인 자전거 도로가 예쁜 선을 그리고 있었다




’ 노을’과 ‘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전망대 카페로 말할 것 같으면, 단 한번 방문으로 내겐 가장 그리운 공간 중 하나가 되었다. 나고 자란 고향이고 매해 그리움을 안고 방문을 하지만, 그리움의 대상과 실체는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이미지로만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곤 이제는 이방인이 다 된 나를 번번이 발견한다. 기억 속의 고향은, 기억 속의 한국은 더 이상 실제가 아니다. 흘러간 강물 자락은 이미지로 남은 것이고,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내게도 그리고 현재의 한국에게도 실제가 아니다. 그리움의 실체에 닿고자 공간적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더라도 시간의 거리는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간극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지나간 시절의 이미지와 현재의 실제를 연결하는 단서는 뜻밖의 공간에서 찾아지기도 한다. 최첨단의 기술로 지어진 화려함을 자랑하며 하늘로 치솟은 이름난 전망대의 레스토랑이나 카페와는 달리, 한강변의 소박한 전망대는 마음에 세겨진다. 서울의 잠실과 뉴욕, 토론토, 홍콩, 그리고 파리에 세워진 고도의 전망대에서 지상의 마천루를 내려다볼 때는 아찔한 감각에 몸과 마음이 압도된다. 그런 아찔함을 위한, 이벤트를 위한 전망대에 서면 이제 나는 무서워서 잘 걷지도 못한다. 하지만, 도시의 옆모습에 눈높이를 맞추고 강에 발 담그고 서있는 한강의 소박한 전망대는 아늑할 뿐 아니라 <문학동네> 전용 서점까지 겸하고 있었다. 몇 해전 권희철과 신형철이 진행하던 문학동네 팟캐스트는 산책길에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권희철을 끝으로 팟캐스트가 끝났을 때는 섭섭한 마음 가득했다. 그래서였던지 서가에 나란히 꽂힌 담백한 표지의 시집들과 소설집들은 내게 말하는 듯했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여기서 나갈 생각 하지 말아라."



카페이자 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전망대의 실내는 깔끔하고 현대적인 설계로 빛이 쏟아져 들어와 환하다.  외벽이자 내벽인 유리벽을 마주하고 앉으면 주변의 모든 사물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눈 앞에 보이는 강의 풍경만 남았다. 동작대교 위로 전철이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오고 자동차 지나가는 풍경이 느닷없이 눈에 들어온다. 예상치 못했던 그 풍경은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갑자기 눈 앞으로 불러오는 것 같다. 바닷가 찻집의 유리벽을 통해 바다를 내려다보던 지난 시절의 시간과 전망대 유리벽을 통해 강물을 내려다보던 그 순간이 무의식 중에 겹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속도감 없이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전철 위로, 대학 시절의 몇몇 저녁 무렵의 풍경들도 떠올랐다. 도서관에 있다가 성당의 기도모임을 향하던 시간엔 해가 지고 있었는데, 성당은 학교와 전철역 사이에 있었다. 작은 골목길을 걸어서 성당엘 가는 시간엔 엔리오 모리코네를 자주 들었다.


동작대교 위로 전철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풍경을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도 왜 느닷없이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이유를 짐작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20대의 늦은 밤, 창 밖으로 보이는 전철역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마지막 전철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짧지만 길었던 시간들의 기억이 겹친 거다. 대학교 3-4학년은 지정석이 마련된 정독실이란 폐쇄된 공간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는 매일같이 이른 아침 시간과 밤 열 시에 출석 점검을 했다. 개론서와 통계책을 제외하고는 전과목이 원서라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1 학년과 2학년 때의 손실을 만회해야 했기에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차단해 스스로를 가두는 시간이 필요했다. 2층이었는데, 창 밖으로 손을 뻗으면 도토리나무가 손에 닿을 듯했다. 저녁 열 시에서 열 시 반 사이에 도서관을 나서 하산을 했고, 학교 앞 전철역까지는 15-20분이 걸렸다. 전철역 입구에는 낭만적인 영화 제목을 딴 2층 카페가 있었는데, 그 카페의 바에 앉으면 창 밖으로  길 건너 2층 전철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카페 천정엔 마른 장미꽃이 촘촘히 가득 걸려 있었는데, 장미꽃밭이 통째로 뒤집어져 천장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마른 장미가 가득 걸린  천정을 올려다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모딜리아니의 목이 길고 기우뚱한 남자와 손을 무릎 위로 가지런히 모은 여자의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나는 모딜리아니가 이 카페에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출석 점검이 끝나고 모두가 하산을 한 뒤에도 조금 더 지체하다가 홀로 도서관을 나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전철역을 향해 걷는 도중에 퇴근시간이 엇비슷했던 정독실 동지라도 마주치면, 하루 종일 닫혔던 말문이 트이곤 했다. 그때 우리는 남은 20-30분 사이에 하룻 동안 가둬 두었던 말을 모두 쏟아내곤 했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았던지... 마지막 전철이 몇 시에 들어왔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11-12 사이였던 것은 분명하다. 전철역에 도착했지만 이야기가 미쳐 끝나지 않은 날은, 나는 동료들과 반대 방향의 전철을 타야 했기 때문에, 전철역 앞 2층의 카페로 올라갔다. 병아리 눈물만큼 주는 브랜디를 시켜놓고는, 바에 앉아서 창 밖으로 전철역을 노려보며 10-15분 정도 수다를 이어갔다. 두 번째 마지막, 그러니까 마지막에서 두 번째 전철이 역을 빠져나가면 우리는 카페를 뛰어 내려와 마지막 전철을 타곤 했다. 스스로를 가두었던 시절, 하루를 마감하는 스릴 있고 다이내믹한 최후의 30분이었다. 한 번도 마지막 전철을 놓친 적은 없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웃었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시간을 만끽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전철이 지나가는 풍경을 카페의 창을 통해 바라보며, 시간의 압축을 만끽하던 시절의 기억이, 20년도 더 된 시간의 지층을 켜켜이 뚫고 무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동작대교의 전망대에 선 내게 퍼즐의 한 조각을 건넨 것이 지난봄의 어느 날이다. 그리고 20년도 더 오래전 그 시절의 기억과 지난 봄날의 동작대교에서 발견한 기억의 퍼즐, 두 사건 사이에 놓인 연관성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른 건 오늘이다.   



초봄의 냉기가 남아있던 계절이라 편의점을 겸한 시설에서는 고구마를 굽고 있었고, 그 달콤한 냄새가 실내로 퍼져가고 있었다. 깔끔하고 조용한 도서관과 간이 편의점의 결합은 뜻밖의 어수선한 조합이었지만, 편의점은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이기도 하다. 미국엔 약국이 한국식 편의점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국 체인의 거대한 약국이고, 실내가 너무나 넓고 취급하는 물건은 너무나 다양하다. 한국식 편의점이 주는 편리함과 소담한 느낌은 사라지고 만다. 그 소박한 카페가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한국의 카페를 가득 채우기 마련인 여인들의 소음이 전혀 없던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카페를 가득 매운 여인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소리 역시 매우 한국적인 풍경이다. 동년배의 그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카페에 모여 앉은 것은 무척 신기한 현상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들이 개의치 않고 만들어 내는 소음에 익사할 것 같은 공포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공연장을 겸한 루프탑이자 야외 전망대는 계단식 스탠드도 마련된 작은 공간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움직임이 정지한듯 보이는 한강과 왼쪽으로 오전에 다녀왔던 국립현충원이 벚꽃 속에 안겨있는 풍경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고충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강 위로 낙하할 저녁의 석양과 불빛의 보석으로 가득할 야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지..... 그때는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저녁 이곳으로 차를 몰아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해가 지기까지는 몇 시간이 남아있었고 아버님은 강아지를 안고 전망대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지체할 수가 없었기에 야경을 기다리는 일에는 아쉬운 안녕을 고해야 했다. 지나간 시절의 이미지와 현재의 실제를 연결하는 그 공간은 새로운 그리움의 대상이다. 매일같이 그 다리를 건너 출퇴근을 하는 친구는 퇴근 시간, 강과 도시 위로 내리는 석양의 황홀함과 야경의 아름다움을 자랑했지만, 아직까지 사진 한 장 보내주지 않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 어떻게 사진을 찍어... )

(그렇기야 하지만, 잠시 차를 멈추고 먼 곳에 있는 친구를 위해 카페를 들어가 야경을 담아 보내는 여유도 가지란 말이야. 운전하면서 사진을 찍는 실력을 기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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