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규칙적인 수면습관에 관한 이야기 feat, Gillian Flynn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데,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는 새는 종종 다음날 잡아야 할 벌레를 미리 잡아놓고 잠자리에 들곤 한다. 그게 나다. 벌레를 잡으려고 늦게까지 깨어있던 것은 아니고, 철들 무렵부터 밤에 잠을 안자는 습성이 있는데, 아직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깊은 밤에 혼자 깨어 놀기를 즐긴다. 우리는 함께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 밤에 잠을 좀 정상적으로 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튼튼한 해상구조물의 설계원리를 평균과 표준편차의 예를 들어가며, 내게 수면시간과 관련해 신체가 느끼는 표준편차를 줄이라고 완곡하게 설득하던 남편이다. 그러던 본인 역시도 방을 옮겨 다니며 퇴근 후 시간을 즐기며 잠을 안자고 버티며곤 한다. 어쨌거나 3월 마지막주 월요일이 되자 전연령대 접종이 시작되었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고 10분이 흐른 뒤 접종 예약을 완료를 했다. 백신접종에 대단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캘린더에 두 개의 확정된 날짜를 적어넣고 나자 갑자기 아드레날린 러시가 몰려왔다. 봄에서 여름까지 모든 날짜를 세고, 가능한 한국으로의 비행 루트를 궁리하다가 밤을 꼴딱 세웠다. 멀리있는 큰 아이도, 동부에 있는 친구도 4월의 시작을 백신접종과 함께 해 4월말까지 2차 접종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이대로라면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안정적인 수준의 면역도 도달할 것 같아 보인다. 팬데믹 초기에 개인의 자유를 외치며 말 안듣다 죽을 궁극의 권리까지를 몸소 실천해 보이며 세계로부터 지탄받던 미국이 결국에 보이는 저력은 이런 것이다.
<gone girl> <dark place> <sharp object>를 쓴 길리안 플린의 재미있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것은 그녀의 새로운 작품이 영상 시리즈로 제작되어 HBO max에 올라올 무렵이었다. 지난해 여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녀의 신작은 이전 작품들과는 판이할 뿐더러 쿠엔틴 타란티노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어서 첫편을 보다 말았다.그녀의 대단한 팬은 아니지만, 드문 드문 발표하는 소설을 따라 읽다보니 전작을 다 읽고 말았다. 어쨌거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로까지 나선 그녀의 일상 인터뷰는 소탈하기 그지 없었다. 나이가 같은 것부터 몇가지 생활의 소소한 면, 예를 들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때와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갈 때 돌변하는 생활 패턴이라든지. 정신작용이 피크를 향해 치닫는 새벽 시간과 기상시간, 늦은 아침에 일어나 미안함을 감추느라 오래전에 일어나 있었던 척하고 목소리를 맑게 가다듬는 행동, 그럴때의 기분을 고백하는 것이 나와 흡사해, 혼자 가져왔던 은근한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을 느끼며 킬킬대며 기사를 읽을 수 밖에 없었다. I like you girl! 노란색 리걸 노트 패드를 기본으로 사용하는 것, 미리엄 웹스터로부터 오늘은 단어를 구독하는 것 등등… 미국인의 일반적인 습관들이겠지만 어쨌거나 이런 소소한 점들이 나와 너무나 닮아서 밤올빼미의 연대감마저 느끼게 하는 인터뷰 였다.
길리안 플린의 전작들은 모두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대중적이면서도 dark psychology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어 예리한 면이 있다. 세 작품 모두 영화와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는데, 오디오 북으로 들었던 <gone girl>이 영화화 되었을 때는, 백합꽃을 닮은 로자문드 파이크가 이중적이고 미스터리한 에이미의 캐릭터를 잘 살려 연기했다. 책도 영화도 모두 좋았다. 두번째 책 <Dark place>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오갈데 없는 가난한 여인이 시골 농장을 꾸려가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달하자 죽음으로 자식들에 대한 사랑을 완성하려 했던 이야기다. 죽음으로 자식들을 보호하려 했던 모성의 은밀한 계획이 빚어낸 비극적인 이야기, 그야말로 dark psychology 의 진수를 보여준 가슴아픈 영화였는데,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을 맡았다. 역시나 샤를리즈 테론의 필모그라피에 매우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는데, 그녀는 헐리우드에서도 매우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신산한 삶을 자주 연기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샤를리즈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개로 갈린다. 그 미모를 갖고서 왜 저런 역할들을 자꾸 하느냐는 안스러운 시선과, 미모와 더불어 삶을 심연을 이해하는 밀도있는 배우라는 애정어린 시선이다. sharp object는 딸들을 향한 엄마의 가스 라이팅과 살해를 다룬 크레이지 다크한 소설인데, 요정같던 에이미 아담스가 역변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 드라마 속 에이미 아담스는 애초에 그녀가 동화속 요정같은 모습으로 등장했을 때 내게 주었던 충격과 맞먹는 충격을 주었다.
요정같았던 에이미도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최신작 <힐빌리의 엘리지>에서는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요정같은 미모가 연기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요정같았던 비현실적인 외모를 반성하며 미국인들의 친밀한 체형으로 돌아가자는 physical correctness 운동이 헐리웃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에이미가 왜 그럴까 나는 정말 걱정이 된다.
두번째 출간할 책을 다시 한번 탈고하고, 마감이 정해진 몇 개의 짧은 글을 마무리 지으며 3월을 보냈다. 탈고, 재고, 삼고, 사고.... 어디에서 끝나게 될 지 모르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자청해서 원고를 계속 뒤집는 번거로움도 익숙해지다보면 재미가 붙는다. 다소 자학적인 재미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