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신비란.
생의 모든 경험과 기억을 담은 시간이 결국은 두부 두 덩어리만 한 물질 속에
"저장"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비로운 일이다.
뇌에는 삶아온 시간과 모습이 물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응결된 두부 같은 뇌를 앞에 두고 말하던 해부학 교수도 있었다.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뇌의 피질에 새겨진 삶의 흔적이란....
유물론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무시무시한 경고다.
기억의 저장고에 들어가기 위한 반복학습의 기회조차 없었던 순간적인 인상과
단 한 번 스쳐지난 장면들, 두 번도 아니고 단 한 번의 스쳐지남이었을 뿐인 장면들,
냄새와 소리를 비롯한 낯선 감각이 시냅스 회로를 형성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음에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두개골 속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다가
낯선 타인과 마주하고 앉은 어느 날 한 순간
먼지 한 알, 밀가루 한 알 같은 그 기억 속의 이미지 하나가
나 불렀나요... 하면서 뛰어나오는 것은 신비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은 여행을 할 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을 만날 때 일어나곤 한다.
기억과 경험이 단백질 세포 속 어딘가에 저장이 되는지, 바람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인지
평상시에는 알 길도 없고,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진실을 무심히 발견하는 순간의 놀람이란.
말하자면 한여름 밤하늘에서 슈우웅 소리를 끌면서 터지는
불꽃 한 알 같은 것. 그런 것이다.
happy fourth of July!
미국 대륙의 밤하늘에는 오늘밤 얼마나 많은 불꽃이 터지고 있는지.
달리 비유하자면 내 눈은 마치 자동카메라와 같아서
일거수일투족을 일생동안 촬영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사람이든 장소든 특정한 대상을 만나면
눈앞의 대상이 과거 어느 장면의 한 순간과 매칭되는 순간을
냉큼 자동으로 스냅숏을 추출해 대령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성능 '기억 속의 이미지 자동 추출 프로그램' 같은 것.
그 자동 이미지 추출 프로그램이 뽑아낸 스냅숏이
생각지 못했던 안부 엽서 한 장처럼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순간
내 앞에 앉은 낯선 타인은 인연이 되곤 한다.
스냅샷의 반가움이 연결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타인이었으면 좋았을 인연 또한 없지는 않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J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난 주말 콜로라도 고원을 내려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돌아간 J가.
그녀는 미래의 거처를 두고 콜로라도 고원과 텍사스의 평원 사이에서 갈등 중이다.
그 신선계를 뒤로하고 이 물욕 가득한 평원으로 어찌 내려오는 올 수 있겠는가.
콜로라도 고원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콜로라도인들의 필수품 스바루를 진작에 마련해 두었음에도
나는 아직 그곳을 다녀올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지난 주말, 그녀는 푸른 바다빛 suv를 몰고서 내게 왔다.
볼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어, 운동을 취미 삼거나
실내에 조용히 들어앉아 자기 계발 말고는 할 것이 없는
이 서버번의 고요한 삶의 현장에도
고원의 신선계에서 내려온 그녀를 매혹하는 구석은 있었던 가보다.
J는 '기억 속 이미지 자동 추출 프로그램'의 스냅샷이 이어준 인연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잠시 같은 반에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그런 J와 연락이 닿은 것은 3년 전,
세상이 왕래를 단절했던 조용하던 시절이었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그리고 3년간 종종 전화통화를 하던 J는 마침내 콜로라도 고원을 내려와
열네 시간을 운전해서 깊고 깊은 텍사스 평원의 끝자락에 닿았다.
3년 전 그때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이나 다름없는 마포에서 홍대 앞의 스튜디오까지
출퇴근하며 프로젝트 하나 진행하고 있었다. 아 서울은 얼마나 넓은지....
한강을 건너 집으로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먼지...
일이 예정했던 일정보다 길어져 한 달을 넘게 호텔에 머물렀다.
객창감에 시름하는 마음을 안고서 공덕동 거리를 걷던 그날
거대한 콘크리트 성벽 같은 건물 위의 수십 가지 병원간판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기능에만 충실한 미적 요소 하나 없는 매머드 건물이 숨 막힌다 싶을 때쯤,
수십 가지 간판 중에 한의원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통속적이고 낯이 익은 한의원을 상호를 발견한 순간
기억 속의 이미지 자동 추출 프로그램이 스르륵 작동하기 시작했다.
15년 전 어느 날 밤에 또다른 친구 A를 따라 들렀던 그녀 남편의 한의원이 아닐까 싶었다.
마포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귀국한 지 며칠 안돼서 사방이 낯선 데다
밤이라 더 낯설었다. 그때 그 동네가 여기였구나.... 반가웠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전구 하나가 켜졌다. 불꽃 한 알.
세상의 왕래가 끊어진 시절이라 그 우연한 발견이 반가웠다.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a와는 한의원을 통해 15년 만에 연결이 되었고
a는 콜로라도에 있는 J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열일곱 살에 같은 교실에 있었다는 기억과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뿐인 J.
성악과 작곡을 전공한 그녀는 유럽에서 공부한 뒤
콜로라도로 옮겨와 25년째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신선계의 내공이 담긴 그녀의 언어는 고원의 정기를 먹고살았기 때문이었을까.
기억하는 열일곱 살의 그녀는, 앉은자리에서 가끔 친구들을 돌아보며
달관한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날릴 뿐, 자기표현이 없던 친구.
찬바람 쌩쌩 날리던 그 시절의 나는
대책 없는 무방비 상태로 100% 무해해 보이는
그녀의 동글동글한 미소를 신기해 하곤 했다.
열일곱 살 나는 그녀의 억양이 내가 떠나온 그 도시의 억양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질문이 몇 번 더 이어졌을 때 그녀와 내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에 잠시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어떻게?
기억 속의 이미지 자동 추출 프로그램이 스르륵 작동을 해서
2학년 교실 어느 날 아침의 스냅샷을 가져다주었다.
그날 아침 선생님은 한 친구를 교실 앞에 세우고 전학 소식을 전하셨다.
그 장면이 기억나자 머릿속에서 작은 불꽃이 터졌다.
그날 아침의 그 장면은 일 일곱이 된 내가 굳이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특별한 감정이 깃든 것도 아니었고, 전학 가는 친구는 잘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내가 그날 아침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길이 없는 희뿌연 망각의 여덟 살의 날들이었다.
친구의 억양과, 몇 가지 퍼즐조각이 의도치 않게 그 아침의 장면을 되살려 왔다.
정면만 보고 걸었고, 옆 사람도 기억 못 하던 내가
30년이 지나서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불러낸 초등학교 2학년 어느 아침의 스냅샷
3년 전 마포의 거리를 걷다가 한의원 상호가 불러낸 기억의 스냅샷
두 장면의 우연한 겹침 덕분이다.
기억 속의 이미지 자동 추출 프로그램이 내 머릿속에서 작동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텐데.
먼지 두 알이 여덟 살 때, 그리고 열일곱 살 때 잠시 붙었다가
각자의 바람을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만나기까지...
그 가을을 마포에서 보낸 뒤 겨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와
화상으로 서로의 생존 확인을 했을 때,
J는 예의 그 100% 무해한 동글동글한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띠고
100% 순도의 고향 언어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J와 대화를 할 때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 또는
태어나서 처음 배운 언어도 억양도 전혀 바꾸지 않은
나의 고모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한다.
건실한 생활인들과는 나누기 어려운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대체로 나누는 우리의 대화는 그녀의 미소처럼 무해하다.
두 알의 먼지가 앞으로 어떤 궤적을 그리며 나가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