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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ul 23. 2024

얼굴은 이야기를 담고 있네



증세의 도시는 중앙에 형성된 광장 마켓을 중심으로

돌로 만든 골목과 주택들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중세와 21세기의 미국의 스케일이 다를 뿐.  

미국의 중서부와 남부 대도시들 역시 동일한 개념을 기본으로 확장되었다.

신대륙의 대도시에선 미래 지향적인 거대 서사가 펼쳐지지만

중세의 작은 도시에선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이 직접 화법을 구사한다.

모든 골목과 정원, 촘촘히 붙어서 방벽처럼 늘어선 주택과 건물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건물마다 세겨진 이야기기 발길을 멈춰 세우는 덕분에 산책은 길어졌다.


사진은 어떻게해도 실물의 아우라를 담아내지 못한다.

실물의 아우라를 완벽히 담아내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지만

그림은 사진보다는 낫다. 실물을 과장하기도 좋다.  

그래서 호크니의 알록달록한 풍경이 감동적이고, 루시앙 프로이트가 감각적 충격을 주는 것이다.

미디어에는 여행 프로그램이 넘쳐나지만 굳이 힘들여 여행을 떠나는 일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다.



현대의 무미 건조한 상호와 네온 간판에 비하면

중세 상점 간판과 문패들은 집주인의 직업을 장인정신을 담아 세긴 예술적 소품이다.

물론 현대의 이미테이션이겠지만, 적어도 그 원류는 오래된 전통이고 현대의 창작은 아닐 것이다.

그림은 문자보다 , 입체적 그림이면 더 좋고, 강력한 정서 전달력이 있다.  

예술작품이라 해도 좋을 그 아기 자기한 문패에서 중세 상인들의 직업과 삶에 대한 애착을 엿본다.  

더 예쁘게, 더 정교하게....


사람들의 얼굴은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다.

.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은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다.

나는 그들을 스쳐지나며 은밀히, 그리고 재빨리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낸다.

호텔 레스토랑과 길 모퉁이에서 마주치는 시니어들의 인상은 왠일인지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시킨다.

몇 명을 마주쳤을 뿐이지만, 그들은 어깨가 굽고 주름이 깊게 패인 후에도

여전히 생각이 하나로 모아진 표정을 하고 있다.

자기안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꽤나 즐겼을 젊은 시절이 상상되는

노인들의 얼굴은 신선한 놀라움이다.


알쏭당쏭한 초현실주의 그림을 많이 그렸던 잘생긴 화가 마그리트.

그는 20세기 초반의 얼굴이라기엔 과하게 지적인 용모를 가졌다.

영롱한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마그리트의  아내도.

특별히 잘생기고 아름다운 예술가 부부는

화가의 그림만큼이나 비현실적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마그리트는 벨기에 사람이었고, 브뤼셀에는 마그리트 미술관 조차 있지 않은가.

그럼 그런 느낌을 주는 얼굴이 이 고장의 지역적 특징인가?


파리에서 마주친 얼굴들은 특히나 흥미롭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19세기의 그림에서 익히 보아왔던 얼굴을 많이도 마주쳤고,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그림 속 모네를 닮은 노숙인을 마주친 것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을 보고 한참 웃고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모네님이 어째서 여기 이렇게....'

순간 놀랐고 다음 순간 반가운 미소가 슬며시 지어졌다.

모네님 여기서 뭐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아마도 피사로가 장난스럽게 그려준 것으로 기억하는

이 그림속 머리 납작한 초상화의 주인공이 모네다.

그림의 왼쪽 배경에 대충 그린 희미한 스케치는 아들 쟌을 낳고

라이언 킹에서처럼 들어올리며 기뻐하는 모네고,

오른쪽 위에 얼굴이 오각형인 남자는 문제적 화가 꾸르베다.  



butcher's wife Janny


우리가 머물렀던 브뤼게의  B&B 안주인 야니는 예쁜 인형처럼 복스러운 볼을 가졌다.   

눈 아래 하관이 매우 안정적이고 예쁜 입이 마리오네트 인형을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현관 벨을 누를 때마다 에니메이션 주인공같은 소프라노로 대답하고 문을 열어 주곤 했다.

삐 소리와 함께 두꺼운 문이 열리면  머스크와 샌들 우드가 적당히 섞인

세련되고도 묵직한 실내의 향기와 모던한 인테리어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박공의 지붕이  아름다운, 골목의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는 하얀 벽돌집이었다.  

골목의 안쪽엔 공원이 있었다.

현대적으로 개조된 3층 집을 통채로 쓰는 행운은 여행의 시기 덕분이었다.  

가로로 놓인 모든 가구가 보통 가구의 두배쯤 길었고,

세로로 놓인 모든 구조물이 평균 이상으로 길었던 야니네 B&B.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3층의 넓은 방은 목조 구조였지만

고급스럽고 큼직한 인테리어가  여느 고급 호텔 못지 않았다.

더 좋았던 것은 방이 정방형이 아니어서  구석 구석 숨어있던 빈 공간이었다.

안네가 숨어서 일기를 썼을 것만 같은 그런 구석지고 비밀스런 여백 공간.    

손을 뻗어 열 수 있는 천창이 경사진 지붕 위로 나 있었다.

문득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 위 유리창에 비듣는 소리가 꽤 시끄러울지도 모르지만.

비가 내리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햇살이 환하게 부셔져 들어와도 모든 날이 좋을것 같았다.  

감수성 충전하기 딱 좋은 그런 집은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 장난기를 단번에 되살려 냈다.    


만화주인공 같은 목소리에 복스러운 복숭아빛 뺨을 가진  butcher's wife 야니는

고등학교나 졸업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었지만.... 무려 서른살이나 먹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수백년 된 3층짜리 주택과 브뤼게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동물 농장,

그리고 농장에서 나온 육류를 판매하는 가게를 트리플 세트로 운영하고 있었다.

자부심 가득한 butcher'w wife의 삶은 재미있어 보였다.  

포화상태의 유럽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텐데

야니는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벨기에의 딸기부심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여러가지 빵과 과일과 치즈와 햄을 종류별로 조금씩 나누어

둥근 나무 쟁반에 각각 한상씩 차려서 내왔는데,

딸기는  딱 두 알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우리네 딸기는 특별하다구.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서 딱 두 알이냐? 한 알 주면 정없을까봐?)    

그런데 딸기가 매우 크고도 완벽한 삼각형인데 과육이 반투명한 것이 정말 특별하긴 했다.

평평한 윗부분에는 딸기꼭지가 아기 배꼽처럼 과육 속에 파묻혀 있었다.

딸기꼭지를 손이나 포크로 따낼 방법이 없었다.  

나는 딸기를 하트 모양으로 자른다. 윗부분에  V자로 칼집을 내 꼭지를 딴 뒤

절반으로 자르면 두 개의 하트가 생겨난다.

딸기가 충분히 크다면 세 개 네 개의 하트를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곤 접시 가득 빨간 하트를 담아 낸다. 그런데

야니의 딸기는 V자로 칼집을 내기에 너무 견고헤서  아까웠고 먹기도 아까웠다.


벨기에의 딸기 부심을 다음 날 아침 거리에서 다시 만났다.

이틑날 아침 산책길,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향해 걸어가다가

자전거로 폭주하는 딸기 인간, 개구리 인간, 바나나 인간들을 마주쳤다.

때 아닌 산타도 소환되었다.

개학인데 왜 학교를 안가고 저러는 것일까.....

집 주인 야니에 따르면 벨지움의 고3들 졸업까지 100일간 남았는데

그동안 매일 저러고 코스튬 파티를 하며 밤낮으로 해방공동체를 시연한다는 소식이다.

심지어는 저 아이들은 밤에도 잠을 안자고 우리집 앞의 공원에서 소리지르고 놀았다.

미국의 고 3들은 가을에 다닐 대학 이름, 합격한 대학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데,

중세 도시의 고 3들은 딸기와 바나나 개구리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누빈다.

중세 도시와 자본주의 정글의 차이.

초상권을 허락해달라  부탁할 용기가 없어서 몰래 살짝 뒷모습과 원거리 불법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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