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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Sep 02. 2016

우리에게 남겨진, 백퍼센트 부모노릇을 할 시간

                H라는 소녀는 텍사스에서는 드물게 보는 프레피한 외모를 지녔다. 그 엄마와 똑 닮았다. 작은 아이와  H는 기저귀 차고 몬테소리 다니던 시절부터 초등 중등을 같이 다니고 있다. 이사를 가지 않는다면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갈 것이다. 제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둘은 종종 동네 호숫가에서 발견된 다친 동물들을 치료해주며 animal rescue를 함께 하기도 하고 죽은 아기 거북이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주고 꽃과 오리가미를 위로로 무덤가에 놓아주기도 하곤 하였다. 둘은 작년 부터 프렌치를 2년째 같이 듣는다. H는 이번 여름을 프랑스에서 보내고 프렌치 일취월장해서 돌아왔고 작은 아이는 한국에서 여름을 보내느라 프렌치 다 까먹고 돌아왔다.  
 
오늘 저녁, 오픈 하우스가 있어, 교실마다 돌며 선생님들과 인사 나누었다.  tour de france를 "투드퐝~"이라고 날아가듯 발음하는 프랑스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던 중,  텍사스에서 드물게 보는 프레피한 용모의 날씬한 백인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H 아빠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간 학교의 각종 행사에서 소녀의 엄마를 만나왔는데, H의 아빠를 학교에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H의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이들 3학년 여름, 수영장에서 였으니 무려 6년 만이었다. 아이들이 4학년이 된 어느 여름, 수영장에서 하루 종일 같이 놀던 소녀의 엄마가 헤어지면서 내게 툭 던진 말이
"그런데 말이야 나 작년에 이혼했어,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그 엄마는 꽤 큰 숫자를 다루는 일을 하는 큰 기업의 파이낸셜 매니져이고 독특한 유머감각이 있는 여인이었다.  부부의 연이란 참 어려운 것이로구나하는 생각에 그 여름은 머리가 꽤 복잡했다. 다른 한 친구도 이혼을 했던 것이다. 두 가정 모두 부부가 공히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6년 만에 얼굴을 본 소녀의 아빠는 머리카락이 완전한 백발로 변해있었지만, 전혀 나이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혼을 하고 새로 꾸린 가정의 이야기며, 그가 다니던 회사가 더 큰 회사로 합병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전해주었고, 나는 남편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동네 아저씨를 6년만에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가 H와 나누어 가진 유전자의 힘이 아닐까라고 나는 말했는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동의하기를 망설이는것 같았다. 실은 소녀는 누가 보아도 제 엄마를 빼다 박아 우리가 "엄마의 미니미"라 부르는 아이지만, 아빠와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니, 반듯한 이마며 약간 슬픈듯 똘망한 눈이 꽤 소녀와 닮아 보이기도 하였다...

소녀가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에 동의하기를 망설이던 그가 말을 꺼내 놓았다. 그가 유럽계 이민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텍사스 가정에 입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부터 우리에게 말해 주었었다. 그런데 얼마전 생모를 찾았노라 했다. 같은 스테이트 안에서 생모를 발견했다 했다. 남의 일이지만 왠지 내 마음도 벅찼다.  이제 81세가 되신  생모가 소녀의 사진을 보더니 내가 한 말과 같은 말을 하더라고도 했다. 아마도 유전자의 힘이란게 있긴 한가보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니, 그의 지난 인생은 참으로 쓸쓸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을 입양해서 키워준 엄마는 92세가 되셨는데, 생모는 81세이니, 키워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생모와 함께 할 날이 더 많이 남아서 참 다행이란 말도 하였다. 새로 찾은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노라고, 남은 날들 함께 좋은 시간들 가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전했다. 소녀의 아빠의 채워지지 못했던 마음 한 구석도 이제는 차고 넘치는 기쁨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평생 생모를 그리워하며 지낸 그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남은 일이십년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나보다 커져버린지 오래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순간 순간이 소중한 역사다. 그래서 이번 학기엔 학교 발런티어에 열심히 참여해 보기로 한다. 한 녀석은 내 지붕아래 있을 날이 아직 2년이 남았고 작은 녀셕은 5년이나 남았으니 우리들의 역사책을 열심히 써보아야지 않을까...


 © Yoon Hyunhee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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