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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Apr 05. 2020

살림에 관한 오해

소우주(小宇宙)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를 한 후 가장 먼저 침대를 정리한다. 창문을 열고, 밤새 구겨진 솜이불을 탁탁 털어 반듯하게 펴고, 요즘처럼 바이러스가 극성인 때에는 살균 스프레이를 베갯잇과 침대 스프레드 위에 뿌린 후 가지런히 놓고, 베개 위로 이불을 덮는다. 이불이 네모지게 정돈이 되면, 집들이 선물로 받은 이솝 홈 스프레이를 오빠와 내 머리맡에 두 번씩 칙칙 뿌려서 마무리. 밀폐된 공간에서 홈 스프레이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에 따라, 창문을 10분 정도 더 열어 두고 서재로 출근해서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내리는 와중에 잠깐 안방에 들어가 창문을 닫으면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남는다. 보통 안방은 다른 냄새로 오염되지 않도록 하루 종일 문을 닫아 두는데, 자기 전 안방에 들어가면 아침에 뿌려둔 라벤더 향이 기분을 간지럽힌다.



  뭐든 효율을 최고로 치는 성미답게 루틴을 만들고 습관화하는 일을 아주 좋아하는데, 작년 겨울 결혼 이후 ‘침대 정리’는 아침을 시작하는 루틴 중 하나가 되었다. 침대를 정리하지 않고 방 문을 나가면 그렇게 찝찝할 수가 없고, 바쁜 출근 준비 중에도 빼먹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직장을 갖게 된 이후로는 엄마와 떨어져 5년 이상 독립생활을 하면서도 아침엔 오트밀 정도나 데워 먹을 줄 알았지, 삼십 평생 ‘살림’은 평생 주부였던 엄마의 일이라 생각했던 내 인생에 집안일을 돌보는 습관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침대 정리만이 아니다. 냉장고를 열어, 남은 식재를 살피고, 나무 도마 위에 양파와 마늘, 토마토 따위를 올려 썰고, 계란과 함께 볶아내는 일, 다 먹고 난 그릇은 싱크에 담가 두었다가 음식이 눌어붙기 전에 시원하게 씻어내는 일, 레시피 북을 사서 새로운 요리를 연구하고,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대접하는 일, 한 달에 두어 번쯤 마감 직전의 꽃 시장에 가서 가장 싸게 나온 꽃을 다듬어 화병에 꽂고 매일 물을 갈아주는 일, 주말 아침이 되면 온 집안 환기를 시키고, 로봇 청소기를 돌리고, 오빠와 역할을 나눠 온 집안 청소를 하는 일. 직장에 들어가 운 좋게도 적성에 찰떡 같이 맞는 일을 찾고 나서 근 10년간 커리어 패스만 고민하던 내 인생에 그야말로 일상을 가꾸고 정돈하는 일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적극적으로 즐겁게, 최선을 다해서, 마치 프로젝트하듯이.



  집들이로 친구들을 초대하면, 앞치마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들이 까무러치듯 놀라곤 하는데, 사실 나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광경이긴 했다. ‘센 여자’로 평생을 규정돼 왔고, 직장에서 아주 공격적으로 일하는 성미를 타고난 나 같은 사람들은 직장에 다니며 내가 속한 체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반골 기질 같은 것이 더 극대화되는데, 이 기질이 직장을 넘어 사회로까지 확장되면서 ‘살림’이라는 것이 ‘가부장제’라는 체제에 순응하는 “변절”의 행위인 것 같아, 반감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결혼 직후 몇 주간은 요리와 설거지, 주말 청소 같은 굵직한 살림은 모두 남편이 도맡아 했었다. “순순히” 집안일을 하는 게 체제에 맞춰 나를 바꾸는 행위인 것 같아서 약간 처량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다 시댁 식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게 되었는데, 이왕 하는 집들이를 제대로 뻑적지근한 파티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케터도 직업병이 있어, ‘집들이 대표 음식’으로 유명한 ‘밀푀유 나베’, ‘무쌈 말이’ 같은 건 하기 싫었고, 인스타그램에서 간간히 스크랩해 뒀던 멋진 테이블 사진들을 긁어모아, 솥밥, 이탈리안 수육, 바지락 술찜처럼 약간 이국적이면서도 너무 멋 부린 것 같진 않은 요리들을 리스트로 올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중국요리시켜서 대접해도 크게 상관없다는 주의라, 억지로 내가 내고 싶은 요리를 만들게 할 수는 없으니, 그날로 레시피 북을 사서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로 나는 ‘요리’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요리라는 게 참… 효율과 효과를 따져 목표를 세팅하고, 십 수번의 고민 끝에 결과물을 만들고, 당장 만들어낸 결과물을 예쁘게 포장해서 고객에게 선보이는 일련의 마케팅 활동, 아니 마케팅으로 국한 지을 것도 없다. 그냥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영역이었다. 요리 단계별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미리 예측해서 액션 플랜을 만들고, 때가 되면 재료를 분배하고, 다지고, 익히고, 결과물을 만들어서 요리의 비주얼에 딱 맞는 그릇에 예쁘게 담아낸다. 플레이팅이 허전해 보이지 않도록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꽃을 놓고, 앞 접시와 수저를 두고, 와인 잔을 미리 세팅한다. 그렇게 요리를 내어 놓으면 초대받은 사람들은 적절한 박수와 환호를 섞어 칭찬을 해준다. 우리 엄마가 ‘전업 주부’로서 평생 해왔던 살림이라는 것이, 결코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변절”의 행위가 아니라, 목표를 위해 계획을 짜고, 계획을 이행시키고, 결과를 보고 피드백하면서 더 나아지는 일련의 ‘생산 활동’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프로젝트하듯이 집안일을 쳐내면서 한 가지 더 알게 된 효용이 내 삶에 마침내 적절한 밸런스를 찾아줬다는 거다. 예전에는 일을 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풀 방법이 없어서 무기력해지거나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운동, 명상 등에 집착했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하거나 레시피 북을 편다. 운동이나 명상은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라서 일로부터 도피가 완벽하진 않았는데, 살림은 명백히도 목적의 행위라, 정신적 도피가 훨씬 쉽다. 그리고 살림을 돌보는 일 자체가 원시 시대부터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지닌 행위라 어떤 본능과도 연결이 돼 있는지, 설거지나 청소를 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낀다. 살림을 만나고, 일과 삶의 진정한 의미의 균형이 찾아진 듯한 기분이다. 결혼식 주례를 봐주신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나의 이 깨달음을 미리 예지 하셨는지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일부 문장을 옮겨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저는, 신혼부부가 남자건 여자건 간단한 요리법을 배워서, 휴일에는 가끔씩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불을 사용해서 음식의 재료를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바꾸는 일은 인간이 고대 인류로부터 전수받은 문명이며, 인류 최초의 옹기장이, 대장장이, 연금술사의 꿈을 이어받는 대사업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손수 만들어서 함께 먹는다는 일은 단순한 급양의 행위가 아니라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고, 삶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의 행위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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