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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Apr 12. 2020

자기 확신의 선순환

Lesson Learned

  연차가 이 정도 되고 보니, ‘일’의 대부분은 자기 확신의 과정인 것 같다. 아이디어의 집행까지 십 수 번의 설득을 거쳐야 하고, 이 설득이 제대로 들어맞으려면 무엇보다 내가 그 아이디어에 대한 ‘신념’ 같은 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은 이대로 진행하면 되는지, 그러면 성공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자문자답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 확신은 꽉 막힌 아집이 아니라, 개방성과 성공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옛 직장은 프로젝트 베이스로 일하던 곳이어서 낮은 연차에도 프로젝트 매니저나 디렉터처럼 중간 관리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입사 직후 PM으로 좋은 성과를 거둔 덕분에 프로젝트 디렉터로 빠르게 승진했는데, 디렉터는 직접 일을 하기보다는 PM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잘 굴릴 수 있도록 관리, 코칭하는 게 주 업무였다. 리더의 역할이랄지, 좋은 코칭이랄지 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통찰이 생겨나기 전에 관리자 업무를 맡게 됐던 탓에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에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던 게 일이 잘 안 풀리면 PM에게 짜증이 섞인 화를 내고, 감정적으로 과한 피드백을 했다는 거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에 그랬던 저변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솔루션을 줘야 하는데, 나도 답이 뭔지 잘 모를 때, 속도도 유지하면서 성공시키고 싶지만 나도 방법을 모를 때. 사실 ‘화’의 원인은 내 능력의 부족이었는데, 그땐 그걸 알아차릴 여유도 없었거니와 방어기제만 극대화해 애꿎은 PM만 탓했다.


  이후에 내공이 쌓이고 성공 경험도 만들어 내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고 보니, 그때 부족했던 건 결국 ‘자기 확신’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실행시키면 결국 매출이 오를 거라는 확신, 일이 이렇게 굴러가면 결국 성공할 거라는 확신, 더 나아가서 이번에 잘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확신. 이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생각처럼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일종의 선순환인데, ‘자기 확신’은 일을 성공시키고, 또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로 꼽힐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더불어 일이 마무리되면,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낸 아웃풋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굳은 심지도 생긴다. 결국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을 믿는지 여부에 따라 성패가 갈리고, 만족도 또한 결정되는 셈이다.


  신기한 게, 내가 회사에서 만난 몇몇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균형감과 객관성도 함께 갖고 있었다. 회의 중에도 다른 의견을 경청할 줄 알고, 때로는 반론에서도 인사이트를 얻어 자기 걸로 만들 줄 안다. 사람인지라 자기 아이디어에 대해 일정 기간 고집을 피우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객관성을 되찾고, ‘쿨하게’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안다. 이게 다 ‘틀리더라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아 존중감에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문제는 이게 한국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저렇게 건강한 ‘자기 확신’의 과정을 통해 일을 잘 꾸려가는 사람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를 더 자주 만난다는 거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통 자기 존중감이 없고, 자기 확신이 결여된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첫 번째 부류는 자기 말만 맞다고 고집과 아집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보통 자기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직급에서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같은 회의실에 있던 모든 직원이 우회적으로, 예의를 갖춰 “아니”라고 말해도, 본인은 “맞다”고, “이게 아니면 안된다”고 계속 같은 말을 한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 권위 있는 표정 밖으로 새어 나올 지경이라, 때로는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보통 이런 경우, 회의실에 있던 영리하고 스마트한 부하 직원들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 회의실을 나오며 아집의 시간을 끝맺게 된다. 그래도 이 경우엔, 상사보다 더 독하고, 더 큰 성공 의지를 가진 부하 직원들이 예의를 갖춰 끈질기게 설득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보기 좋게 가공해서 공손하게 다시 묻기를 반복하면 결국 마음을 바꾼다. 아니면, 부하 직원들이 진정성을 살짝 버리고 지시한 대로 따르면 회식 자리의 소소한 추억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문제는 두 번째 부류인데, 이들은 평소에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조언도 주지 않다가, 일이 살짝 잘못되었을 때, 과하게 비난하고, 감정을 섞은 ‘학대적 피드백’을 하는 사람들이다.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작은 실수일지언정 실무 담당자를 몰아세우고, 심한 경우,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으며 화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리고 보통 말 끝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면서 남다른 예언자인냥, 미리 말해줬다면 좋았을 이야기들을 뒤늦게 덧붙인다. 실수를 개선해 잘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고 불안하기만 해서, 불안을 화로 승화시킨다. 이 부류의 사람들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어쨌든 ‘자기 확신’이 생겨나기 전, 충분히 흔들리고 있을 사회초년생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린다는 점이다. 나는 이들을 다른 사람들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고 해서 ‘자존감 헌터’라고 부른다.


  나는 유능하고 성실한 친구들이 ‘자존감 헌터’ 아래에서 일하다 방황하고 퇴사를 고민하던 일을 종종 보았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앞에서 화를 내고, 인신공격을 하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 이 두 번째 부류, ‘자존감 헌터’들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자기 확신이 없는 건, 전적으로 경험과 통찰이 부족한 본인의 문제인데, 자기 문제를 외부로 치환하면서 선량한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자존감 헌터’ 아래에서 고생했던, 그리고 앞으로 고생할 많은 후배들에게 안타까움을 더해 조언을 보태자면, 실수의 크기에 비해 상사가 과하게 화를 내고, 피드백 와중에 하는 말이 논리적으로 아귀가 안 맞는다면, 그 상사의 자존감 수준을 먼저 의심해보자. 그리고 ‘자존감 헌터’ 상사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경험치를 높이고, 실패에서도 인사이트를 찾아가며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면 될 일이다. 그게 일에서의 자기 존중감을 높이고, 자기 확신을 찾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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