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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양 Oct 20. 2017

구제, 세상을 구제하는 작은 실천

"안녕, 잘 부탁해. 이번에 널 입을 사람은 나야."

구제 [구ː제]  [명사] 옛적에 만듦. 또는 그런 물건.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구제, '구제 의류'는 '빈티지 의류'라고도 불리는, 한마디로 중고 의류다. 남이 입었던 옷. 보통 새 옷의 절반 이하로 가격이 저렴하고, 오래되고 낡은 것부터 거의 새 것과 다름없는 것까지 품질도 다양하다.


평소 옷을 잘 입는다는 칭찬을 자주 듣는다. '특유의 느낌이 있다'고들 하는데, 깔끔하고 단정한 매무새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정도지만 나름의 철학이 있긴 하다. 그건 바로 '헌 옷 입기'다.



1. 새 옷은 (거의) 사지 않는다.

물론 '거의'라고 했지 '아예 전혀 절대' 사 입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가끔 새 옷도 사 입긴 한다.

세탁이 까다로운 가방이나 걸음걸이나 체형, 습관에 따라 마모되고 변형되는 신발은 새 것으로 산다.

흰 티셔츠나 셔츠처럼 꾸준히 계속 입어야 하는 옷은 신중하게 골라서 5년 이상 입는다. 지금 입는 옷들 중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입었던 옷도 많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10년 이상 봄/가을마다 잘 입고 있는 코듀로이 스커트

엄마가 젊었을 때 입었던, 30년 이상 된 옷도 여전히 잘 입고 있다.

이 빨간 코트는 엄마가 대학교 들어갈 때 외할머니가 기념으로 사주신 옷. 40년도 더 되었지만 나까지 잘 입고 있다.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의류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시작한 ‘디톡스 마이 패션(Detox my Fashion)’ 운동을 주도하는 이슈우에 따르면 청바지 1벌을 만드는데 물이 약 7000ℓ, 티셔츠 1장에는 2700ℓ가 든다. 제조 과정을 마치면 그 물은 심한 수준으로 오염된다. 요즘은 의류산업이 농업 다음 가는 제2의 수질 오염원이다. 특히 아시아가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지난 20여 년에 걸쳐 미국 의류 브랜드는 생산 거점을 미국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했다. 미국 의류신발협회(AAFA)는 의류 회원사들이 제조의 97%를 해외로 아웃소싱했으며, 그중 75% 이상을 아시아가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미국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확실하다. H&M, 유니클로, 갭 등 패스트패션 브랜드 매장에 가서 상품의 꼬리표를 보라.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중국, 방글라데시에서 만든 제품이 대부분이다. 그런 티셔츠 1장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5달러 정도에 팔린다. 싼 것을 찾는 서구 소비자에게 그만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현지 공장 지역의 주민은 큰 피해를 입는다. 방글라데시의 부리강가 강, 캄보디아의 메콩강 등 극심하게 오염된 강 유역에선 생계형 농업이 죽어가며, 식수가 독성 물질에 오염되고, 주민은 심각한 질병에 걸릴 위험이 크다. 대규모 의료제조가 불러온 저주다.

[출처: 중앙일보] 환경오염의 주범 ‘독성 패션’

할리우드 스타 에즈라 밀러는 새 옷을 사 입지 않는다고 한다. 시상식에서조차 중고 의류, 구제를 입는다고. 이유는 섬유 패션산업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 때문이라고.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모종의 운명을 느꼈다. 아아 나와 에즈라밀러는 소울메이트가 분명해! (매우 일방적이며 에즈라 밀러 님께 몹시 실례되는 폭력적 언행이다)


친구가 학교에서 '실내환경론'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새 옷을 빨지 않고 입으면 그 옷에서 묻어나는 화학 약품이 피부와 호흡기로 스며들어 건강에 아주 해롭다고 배웠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왜 새 옷을 '텍 때고 바로 입고 갈게요'를 절대 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늘 알 수 없는 냄새에 머리가 아프고 멀미가 나서 집에 가서 꼭 세탁을 하고 나서야 입곤 했는데, 그게 그래서였구나... 했다. 옷을 만드는데 석유가 소비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을까? 나는 몰랐다. 합성 섬유로 만들어진 옷은 석유를 정제하며 추출하는 ‘나프타’라는 재료로 만들어진다. 대표적으로 거의 모든 옷에 들어가는 ‘폴리에스터’나 ‘폴리프로필렌’이 합성 섬유. 폴리에스터는 요즘 거의 모든 의류에 사용된다. 그 '알 수 없는 냄새'는 석유였다. 안그래도 석유가 고갈된다 뭐다 말이 많은데, 내가 입는 옷에까지 쓰이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나 역시 (에즈라 밀러 따라한 건 아니다) 환경을 위해 새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구제 의류를 입으면 이미 만들어진 의류를 더 오래, 새롭게 잘 소비할 수 있다. 기존의 옷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가장 최근, 굳게 마음먹고 벽장까지 다 털어서 기부한 옷과 가방, 신발들

나 역시 내가 가진 옷을 중고품 매장에 가져다 준다. 나는 주로 굿윌스토어(장애인들이 분류부터 판매까지 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http://www.miralgoodwill.org/ ), 아름다운 가게( http://www.beautifulstore.org/ )에 기부한다. 못 입게 된, 버려야 할 상태인 옷은 절대 기부하지 않는다! 그러면 안된다. 나의 경우, 바로 지난 주까지도 잘 입었지만 이제는 너무 질려버렸거나 새로운 옷이 입고싶어질 때, 한 벌 새로 들이면 한 벌 내보내는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2.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구제를 입을 때의 장점은 유행을 따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구제 의류 매장에 가보면 알겠지만, 당연하게도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나 스타일은 없다. 사실 철 지난, 촌스러운 옷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좋은 소재, 예쁜 옷, 꼼꼼한 마감을 체크하면서 옷 보는 눈도 길러지고,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기 좋다. 사실 옷을 고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좋은 브랜드의 제품을 사는 것이다. 비싸면 비쌀 수록, 유명하면 유명할 수록 어느 정도 수준의 평균 품질은 보장된다. 그렇지만 텍 떼고, 로고 빼고 옷 그 자체를 보는 눈은 브랜드를 '아는' 것으로는 가질 수 없는 개인적인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옷을 손으로 쓸어보고, 팔목 안쪽이나 목 뒤처럼 보드랍고 약한 살결에 문질러보고, 입어보고, 겉부분이나 목 부분의 로고, 텍 말고 안쪽 허리춤의 소재 표시 텍을 꼼꼼히 읽어본다. 새 옷을 살 때는 동물성 소재를 절대 사지 않지만, 중고품을 살 때는 같은 값이면 조금 더 좋은 소재를 고르려고 한다(글로 써놓고 보니 좀 모순적인 것 같기도 하다). 요즘 인기있는 브랜드는 아니지만, 오히려 브랜드를 잘 알아보기 어려울 때가 더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재와 형태같은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눈여겨볼 수 있다. 

가디건을 고르는 기준은 '단추가 고급스러운지', '짜임이 어떤지', '다른 옷과 잘 어울리는지', '소재와 색감이 좋은지'다.


영국에 갔을 때, 옥스팜에서 구입한 엄청 좋은 울로 만들어진 만원짜리 니트. 요즘도 가장 자주 입는 옷이다.

3. 누군가의 옷으로 선택받았던, 검증된 디자인이다.

바야흐로 지구촌 시대, 전 세계의 유행의 속도가 어느정도 발맞춰지고 있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쏟아낸다. '디자인 검증-채택/폐기' 과정이 아찔할 정도로 빠르고 어지럽다. 이 과정에서 내 취향에 확신을 갖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행하는 아이템을 따라 사는 것이다.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쉽다. 당장 명품부터 길거리 보세 의류까지 비슷비슷한 룩이 있고, 백화점 한 층만 돌아도, 홍대 앞 쇼핑 거리를 한번만 쭉 따라 걸어도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과 색감을 금세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재미있는 방법은, 누군가가 이미 '돈을 지불하고 소유할 만큼' 맘에 들어했던 옷 중에서 고르는 것이다. 구제는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돈을 주고 사서 입고 다녔던' 옷이다. '나 좀 봐주세요! 나 좀 사주세요!' 하는 신상 옷들에 비해 어찌 보면 한결 여유롭다.

내 매력을 알아볼 눈썰미 좋은 새 친구가 누굴까~? 혹시 너니?

라고 중얼거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띄고 옷걸이 사이사이 숨어있는 은둔 고수 같은 느낌이 든다.

뭐랄까, 인생을 어느 정도 겪어 본 어른들에게서 느껴지는 우아한 경륜과 노련미가 옷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신기하다. 조금 쿰쿰한 냄새가 나는 제멋대로의 모습들과 하나하나 눈맞춤하며 매력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과정은 '유행의 틀' 안에서의 안전하고 서먹한 쇼핑과는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다.


3. 누가 어떻게 입었을런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밌다.

엄마는 '누가 입었는지도 모르는 옷'을 '무서워서 어떻게 사입냐'고 질겁을 한다. 뭐, 죽은 사람의 물건을 수거해다가 판다는 얘기도 못 들어본 건 아니다. 그치만 죽은 사람이 뭐 어때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죽음을 상상해 보면, 내가 즐겨 입었던 예쁜 옷들, 곱게 읽은 소중한 책들, 아꼈던 물건들을 내가 죽었다는 이유로 나의 소멸과 함께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순장도 아니고! 무슨 껴묻거리인가! 물건이 무슨 죄야ㅠㅠ- 너무 아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사람이 입었던 옷이든, 께름칙한 사연이 있는 옷이든 옷은 그냥 옷이다. 미신을 믿지 않고서야 (미신을 믿는다 해도, 나는 옷은 옷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내가 귀신이 되었는데 붙을 대상을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결코 내가 입던 스키니진 따위를 고르진 않을 것이다. 사람 마음 다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세상 천지에 바지나 가디건보다 의미있는 오브제가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만약 악귀라면 더더욱 옷 따위에 붙진 않을 것이다. 고작 미니스커트에 붙어서 원한을 발산하는 악귀가 되다니 그건 뭔가 김새잖아...) 아무튼 나는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 옷의 옛 주인이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옷, 가방, 신발과 코디해서 입고 다녔을지 상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일례로 이 옷은 엄마가 어느 교회의 자선 바자회에서 사 온 짧고 얇은 패딩인데, 독일에 가져가서 잘 입고 고이 가져왔다. 얇고 가벼운데 아주 따뜻하고 실용적인데다가 재질까지 무척 좋아서, 입을 때마다 옛 주인의 탁월한 안목과 고급진 감각, 이렇게 좋은 옷을 바자회에 선뜻 내놓은 인품에 감사 인사를 올리곤 했다. (혹시 보고 계시다면... 잘 입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저에게 너무나 소중한 옷입니다...)


4. 첫 빨래를 하며 옷과 친해지는 과정도 좋다.

새 옷을 사면 늘상 하는 일이지만, 재질과 세탁 방법이 쓰인 태그를 꼼꼼히 읽곤 한다. 그렇지만 구제의 경우 특히 신중하게 첫빨래를 한다. 일단 어쩔 수 없이 쿰쿰한 헌 옷 냄새가 나기 때문에 새 옷보다는 조금 번거로운데, 내 경우에는 먼저 애벌 빨래를 한 뒤 세탁기에 돌릴 수 있는 것은 돌리고, 아니라면 손빨래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집 화장실 세수대야에는 손빨래 가디건 두 개가 들어 있다. 둘이 합쳐서 2만원인데 둘 다 메리노 울(양아 미안해...)로 만들어졌고, 일본에서 온 옷이다. 운이 좋게도, 검색해보니 원래는 몇 십만원이나 하는 고급 브랜드의 옷이었다! 감사합니다 전 주인님...


5. 옷에 대한 나만의 이야기가 생긴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새 옷을 사면서 그 옷에 대한 에피소드를 매번 가질 수는 없는 것 같다. 예컨대

'이 옷은 내가 어느 가을, 학교 앞을 걷다가 ㅇㅇ 가게에서 얼마를 주고 산 옷이지!'라고 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새 옷은 많지 않다. (뭐, 있긴 있다. 독일에 살 때, 아울렛에서 발견했는데 무려 70% 할인했는데도 10만원이 넘었던 코트. 너무나 내 취향을 저격해버린 아름다운 디자인과, 맞춤 옷인양 내 몸에 착 감기는 사이즈였다. 이런 옷은 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빈손으로 가게를 나왔는데 그 옷이 꿈에까지 나왔다. 다음날 회사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혹시 내가 없는 사이 팔려나갔을지 걱정하다가, 결국 한 달간 외식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샀다. 중요한 날에 소중히 꺼내 입는 귀중한 옷이 되었다. 사진은 아래.)

바로 이 옷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소중하다! 몇장 봐서 알겠지만 신발과 가방은 늘 똑같은 것이다...

한편, 중고 옷은 하나하나 어떻게 골랐고, 얼마에 샀고, 어디서 샀는지 에피소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위의 모든 옷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이렇게 몇 년이 지나고까지 상세히 쓸 수 있듯이 말이다. 예컨대 아래의 초록색 바람막이는 물물교환 커뮤니티에서 무료로 얻은 것이다. 내가 스스로 번 돈으로 유럽여행을 간다는 글을 올렸더니 한 아주머니께서 유럽은 쌀쌀하니 이런 바람막이가 필요할 것이라며 물물교환 택배 상자 맨 위에 함께 넣어 보내주신 옷. 반신반의하며 가져갔는데, 모든 사진에 등장하는 필수 아이템이 되고 말았다. 돌아올 때 짐이 너무 늘어서 유스호스텔 옆 자리 사람에게 선물하고 왔는데, 지금까지도 후회하는 일이다.

디카 화면을 폰카로 찍은 것. 외장하드가 고장나서 원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실, 새 옷을 사든 중고 옷을 사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 옷을 더욱 더 소비하라고 미디어에서 조장하고, 광고로 부추기고, 각종 프로모션과 이벤트, 신상 출시로 불을 지피는 세상에서 작은 목소리로나마 '있는 옷을 돌려 입자', '옷을 아껴 입고 나눠 입고 바꿔 입고 다시 입자'고 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최소한, 그냥 나 한 사람의 옷입기 철학은 그렇다. 나는 내 스타일링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종종 칭찬받고 있으니까, 이런 식의 옷입기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말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옷입기를 좋아하고 또 곧잘 입으니까 '다양은 옷을 자주, 많이 새로 사 입을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사실을 밝히고 싶기도 했다. 내가 추천하는 구제 의류의 시작은 앞서 말한 '굿윌 스토어'나 '아름다운 가게'다. 부담없이 들러 둘러보고 나올 수 있으니, 근처에 있다면 한번쯤 방문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노련미 넘치는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진 옷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취향을 가진 사람을, 어쩌면 바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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