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오해받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단지 말수가 조금 없었고, 표정이 조금 없었을 뿐.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누군가를 바라보면 누군가는 말했다. '너 어디 아프니? 안색이 안 좋구나. 조금 쉬어야겠어.' 그러곤 아이에게 찬장 안에 있던 감기 시럽을 한 스푼 먹이거나, 소아과를 데려가 진료를 받게 하곤 했다. 가끔 따끔-한 엉덩이 주사를 맞는 날이면 아이는 더 쉽게 잠들곤 했다. 잠들면 오해받지 않으니까.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손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만지작대며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그런 날이면 평소보다 훨씬 더 빨리 잠에 들곤 했다. 아마도 그날 하루는 아이에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너무 많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아이는 쉽게 지치곤 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아이는 쉽게 오해를 받곤 했다. 기분이 나쁜지, 어디가 아픈지, 아이 스스로 알아차리기 전에 사람들은 먼저 나서서 아이를 돌보곤 했다. 버끔 버끔 입을 벌리려 하면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눈만 껌뻑인 채 아이는 점점 더 말을 줄여갔다.
'넌 아무것도 몰라.'
먹고 싶은 것, 생각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 그런 것쯤은 마음속으로만 이야기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조금 느리더라도 결심을 하고 말하려 하거나, 행동하려 하면 사람들은 아이의 의도와는 다른 말을 꺼내곤 했다. 아이는 상대방이 곤욕스럽거나, 틀렸다는 사실에 당황할까 그냥 상대방의 의도를 따르곤 했다. 아이는 그게 '착한 아이'라고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 그렇게 굴면 더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쉽게 오해받고, 그 오해로 살아가는 아이. 사실 아이는 잠이 없는 편이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밤을 지낸 날도 많았다. 아침이 되기 전부터 눈이 떠져 커튼 뒤로 해가 뜨는 느낌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이도 나이를 먹었다. 사람들이 '어른'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되어서야 아이가 자신에 대해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사실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거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할 때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때가 돼야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뇌 속에 태풍이 몰아치기 전 그냥 전원 버튼을 내리 듯, 자신을 소강시켜 버리는 것이다. 아이는 생각했다. 인간도 휴대폰이나 티브이처럼 전원 버튼을 내려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원할 때만 on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순간 off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너무 많은 것에 의미를 두지 마. 마음이 복잡해지잖아.
off - '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의 시간을 즐거움보단 외로움에 빠트리길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 조용히 지낼 나날을 꿈꾸며 어서어서 늙기만을 바랬다. 어서어서 아이를 괴롭히는 것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는 성인이 되고도 몇 년을 더 늙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어른이 된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더 어려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아이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성형외과, 피부과엘 가서 고통을 수반하는 시술을 거침없이 받곤 했고, 어떤 이는 피부에 좋다는 것을 먹어치우고, 어떤 이는 아침저녁으로 피부에 좋다는 화장품을 바르기 바빴다. ‘너 그렇게 관리 안 하다간 한 번에 훅 간다?!’ 누군가는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지만, 아이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늙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인간이라니..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주름이 늘고 얼굴에서 티가 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아이는 조금 달랐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평생의 시간을 어서어서 늙기만을 너무나도 간절히 바랬던, 이 이상하고도 이상한 바람에 대한 결과인 걸까? 어른이 된 아이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삶을 살아간다. 30대 중반의 여자가 20대 초반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행운일지도 모르지. 그래, 어른이 된 아이도 그냥 단순히 동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40대가 되어도, 50대가 되고, 60대가 되어도 늙지 않는 여자의 얼굴이라면?
어른이 된 아이는 제법 일찍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아이 엄마가 되고 나서 제법 많은 삶들이 평온해졌다. 아이를 괴롭히던 많은 것들과의 작별. 그것이 과연 애초부터 가능한 것이었던 걸까? 괴롭힘과 직접적인 거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삶이라는 건 작은 사건 사고와 함께 벌어지는 버라이어티 한 시트콤의 연장선이라는 걸 아이는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일일드라마 속 막장 캐릭터 엄마나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 만으로도 아이는 무척이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엄마와 아내’ 노릇을 제법 잘 해내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흐트려버릴 만큼 곤욕스럽게 잠이 쏟아져 오곤 했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루고 싶었던 꿈이 몇 가지 있었다. 자신이 꾸었던 수많은 꿈들 중에서도 ‘그건 꿈이라기엔 너무 평범한데?..’ 싶을 정도로 너무나 사소한 단어로 이루어진 꿈.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것'.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거창하고 어려운 꿈이라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된 아이는 올해 결혼 10년 차가 되었다. 10년의 결혼생활은 10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만큼 아이의 삶은 표면적으로 보기에 아주 단란했고, 행복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도와주고, 현관문 앞에서 가벼운 포옹과 뽀뽀로 배웅을 한다. 그리곤 남편을 닮은 귀여운 딸아이의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의 옷가지와 가방을 챙겨 9시가 되기 20분 전, 거실 벽시계를 한번 올려다보곤 서둘러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고양이 밥을 챙겨주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곤 커피머신 앞으로 가 집 근처 유명한 커피집에서 사 온 산미가 짙다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커피머신 전원 버튼을 켠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무의식적으로 그날의 날씨, 뉴스, 이슈거리들을 챙겨본다. 어른이 된 아이는 스스로를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엄청 세련된 존재로 여긴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아이는 외출 준비를 위해 간단히 샤워를 한다. 머리를 대충 털어 말리고, 옅은 화장을 하고, 옅은 립스틱을 바른다. 머스크 계열의 중성적인 향수도 뿌린다. 옷장 속 유명 디자이너의 신발과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본다. 어른이 된 아이는 가끔 자신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려 지나치게 애를 쓰는 건 아닐까, 그걸 특별함이라고 여기는 자신이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자신이 참 불쌍하다고 느껴지곤 했다. 그건 그저 정교하게 꾸며낸 아이가 된 어른의 모습. 언제나 그랬듯 아이는 자신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늙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깨닫게 된다. 아이의 행복은 문제를 야금야금 먹고 자란 행복이었다. 어른이 된 아이를 어릴 적부터 괴롭히던 불안, 외로움, 강박증.. 아이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들에 대한 구원이 결혼이나 단란한 가정, 행복, 세련된 어른의 겉모습 같은 것으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저 문제를 먹고 자란 행복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라고 짐짓 생각하게 했을 뿐이었다. 짐짓 알았으면서도 모른 채 했을 뿐, 어른이 된 아이는 자신이 '늙지 않는 사람' 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깨닫게 된 다.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고 단순한 깨달음. 이제 아이는 어른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어른. 아이는 분명 어른이 되었고, 나이도 몸도 마음도 늙어간다. 그런데, 아이는 마음이 늙어갈수록 얼굴이 늙지 않게 된 것이다.
어서어서 늙기만을 바랬던 아이가 늙지 않아서 괴로운 여자가 되었다. 큰 일이다.
에세이를 가장한 짧은 단편들을 써볼 생각입니다.
단편 속 주인공은 제가 될 수도
당신이 될 수도 있겠네요.
혹시 당신의 이야기인가, 의심이 되더라도
이해해줘요. 이건 그냥 짧은 이야기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