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는 여자의 직업란에는 '미술교사'라는 글자가 적혀있곤 했다. 그 직업을 '미술교사'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가끔 의문이 들긴 했지만, 늙지 않는 여자는 결혼을 하고 일을 완전히 놓았다가 어느 날, 자주 가는 구인구직 사이트 게시글을 보고 이력서를 보냈다. 그리고 삼청동의 한 미술관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자 실장이라는 사람이 자리에 나와 앉았다. 실장이라는 여자는 단발머리에 차분한 외모와 단아한 말투를 가졌었다. 외모처럼 꼼꼼하고 차분하게, 늙지 않는 여자의 이력서에 명시된 것들을 하나하나 체크하곤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곤 마지막 질문이라며 너무나 뻔한 물음을 했다.
"그런데.. 아이가 어린데 왜 다시 일을 하고 싶어요?"
늙지 않는 여자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렇지? 나는 왜 다시 일을 하고 싶은 거지? 아니, 그런데 이 실장이란 여자 대체 뭐지? 경력 단절 여성에게, 주부에게, 왜 다시 일을 하려고 하냐니?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거야?'라고 순간 생각이 들었지만 늙지 않는 여자도 정확히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늙지 않는 여자는 당장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만큼 생활이 궁핍한 것도 아니었고, 단절된 커리어가 아까울 만큼 굉장한 사람도 아니었다. 자기애가 강해서도 아니었다. 늙지 않는 여자의 딸아이는 이제 막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꼬마였다. 그저, 또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은 욕망. 아주 오래전부터 늙지 않는 여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곤 했다. 단지,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데 내 아이만 보고 있으면, 가끔 벗어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오거든요. 제가 제 아이 때문에 미치겠는데,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니 좀 아이러니하죠? 그럴 때마다 하루 종일 자거나, 그래도 풀리지 않을 땐 딸을 데리고 종종 미술관에 왔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학부 때부터 그랬더라고요..? 마음의 동요나 충동 같은 게 일어나면 미술관에 와요. 좋아하는 작가나 작업의 전시를 보러 올 때도 있지만, 그냥 구경하러 오는 거죠. 미술관의 높은 천장, 작품에서 나는 묵은 냄새? 나는 그리지 못하는 그림들.. 미술관 안에 있는 사람들도 구경해요. 미술이란 게 뭔지 참 어렵다?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 하는 표정의 사람들..? 작품 제목을 하나하나 읽고 작품을 보면서 메모까지 하는 사람들.. 사진 찍지 말라는데 굳이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그러다 가끔 저를 울리는 작품을 만나면 한참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오기도 하고요. 그런 게 버티게 해주는 힘인가? 그런 걸 항상 느껴요.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진이 빠져 금세 빠져나오고 싶은 느낌이 드는데 미술관은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쇼핑엔 영 취미가 없는 사람인데, 그림을 보면 사고 싶어 져요. 그래서 다시 일하게 되면 결혼 전에 전시 관련된 일을 했었으니.. 이왕이면 미술관에서 아이들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주부이고, 아이 엄마니까 무엇보다도 아이 다루는 일도 전보다 훨씬 더 능숙하고요."
늙지 않는 여자는 어수선한 대답을 늘어놓곤, 자신의 대답이 정말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지 않는 여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어른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들이 오고, 평범한 아내와 엄마가 되었지만 그 평범함이 지긋지긋해지는 날이 왔다. 직업을 얻고 싶고 다른 타이틀을 얻고 싶었지만, 그것이 좀처럼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날이 오곤 했다.
면접이 끝나고 실장이라는 사람은 그날 처음 본 늙지 않는 여자에게 면접과는 상관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은 30대 초반에 결혼을 했고, 1년 3개월의 결혼 생활 마침표를 찍고 돌아온 돌싱이라고 했다. 아주 서툰 연애와 결혼을 했고, 불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나 이해와 합의점이 생기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결혼 생활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사람이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와서, 자기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것 같다고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면접 결과가 어떻든 늙지 않는 여자의 인생을 응원하겠다는 말을 했다.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늙지 않는 여자는 조금 이상한 면접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면접을 본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늙지 않는 여자는 직업을 얻었다. 그것을 '미술교사'라고 말하는 게 맞는지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아트 큐레이션을 하는 회사에서 미술관을 상대로 키즈 프로그램을 제작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반응이 좋아 본인이 제작한 키즈 프로그램 강사로 수업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기업에 프리랜서 미술강사로 강연을 나가기도 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늙지 않는 여자는 이상하게도 '아이들' 이 좋았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생전 겪어보지 못한 많은 감정들을 겪고, 상황들에 놓여 곤란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처한 '엄마'라는 상황에 대한 불평은 없었다. 딸아이에겐, 그리고 아이들에겐 불행을 모르는 깨끗한 얼굴이 있었다. 늙지 않는 여자도 언젠간 가진 적이 있었을 테지만 기억엔 없는 얼굴. 그러니까 적어도 늙지 않는 여자가 만나본 아이들 중엔 불행을 팔아 사람의 마음을 얻을 만큼 불행해본 적 있는 아이는 없었다. 너무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불행을 아는 아이를 만났다면 늙지 않는 여자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대부분 늙지 않는 여자의 미술 수업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 중엔 아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을 만큼의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스럽기도 했다. 늙지 않는 여자는 아이들을 만나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크레파스나 물감을 만지는 일을 할 때면 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때로는 생각했다. 불행을 모르는 깨끗한 얼굴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결핍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아이들의 행복함에 죄책감이 들지 않을 만큼 늙지 않는 여자는 열심히 일했다. 몇몇 학부모들은 개인적으로 자기 아이를 가르쳐 줄 수 있냐며 연락처를 따로 묻기도 했고, 아이들은 내일이 되면 잊어버릴 늙지 않는 여자를 붙잡고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물론, 가끔 이상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이의 뒤에는 이상한 부모가 등장하곤 했다. 편견 없이 타인을 대하고 싶었지만 이상한 부모와 이상한 아이를 볼 때면 늙지 않는 여자는 생각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보이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여자는 두려웠다. 딸아이의 얼굴에 불행을 아는 표정이 드리울까 봐. 늙지 않는 여자는 그녀가 보아온 이상한 부모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늙지 않는 여자의 딸은 종종 그녀에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정말 이상해!!"
에세이를 가장한 짧은 단편들을 써볼 생각입니다.
단편 속 주인공은 제가 될 수도
당신이 될 수도 있겠네요.
혹시 당신의 이야기인가, 의심이 되더라도
이해해줘요. 이건 그냥 짧은 이야기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