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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링 May 05. 2019

비에이, 회심의 카레우동

다이마루




제게 소울푸드가 무어냐 물으신다면


언제쯤 각자의 "소울푸드(soul food)"가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 설명과 파생을 다룬 콘텐츠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호도 기호지만,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각자마다의 사연이 어린 음식. 당시에는 한가지를 꼽는 데에 많은 고민을 했지만, 지금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단언컨대 "우동"이다. 


사춘기때 유난히 즐겨찾던 일식당이 있었다. 당연히 거창한 곳은 아니고, 일본 스타일의 돈까스와 꽤 가성비 좋은 우동을 세트로 묶어서 팔던 곳이었다. 중고등학교 친구와 종종 급식이 아닌 식사를 함께할 때에도 그 집에서 우동을 먹었고, 시험이 끝나고 난 뒤 무리하게 용돈을 깨서 자축메뉴를 고를때에도 우동을 즐겨먹었다. 심지어 3수를 마친 오빠와 함께 수학 능력 시험을 쳤던 비장한 날의 저녁도 우리 가족은 우동을 먹었다. 고단한 날에도, 특별한 날에도 우동 한 그릇은 사춘기 시절 나를 매만져주는 강장제같은 메뉴였다. 


굉장히 자주 먹기도 먹는다. 끼니이거나, 야식이거나, 해장이거나, 간식이거나 다양한 시점과 상황에서 먹는다. 그래서인지 꽤 다양한 우동을 접했고, 그 맛의 스펙트럼에 대한 감각(?)도 예민한 편이다. 그런데 참 의아하게도, 으레 화려한 스펙의 우동을 즐길법한 일본 여행 중 지나치게 소박한 우동집에서 참 맛있게 식사한 기억을 떠올린다.





벽지 같은 비에이의 우동가게 


비에이-후라노를 둘러보는 일정 중, 비에이 역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눈도 꽃도 없었던 극도의 비수기인지라 비에이는 한층 더 황량했다. 역에서 얼마나 걸었을까. 취미로 식당을 한다는(?) 비에이 사람들인지라, 성실하게 영업중인 가게들을 찾기가 꽤 어려웠다. 지도를 켜고 걸어나가지 않았더라면, 지나쳐버렸을 법한 모습의 식당. 흘려보내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벽지 같았다. 


비에이역 근처의 작은 나무문으로 맞이하는 곳, 다이마루.
우동을 기다리던 중 발견한 그림. 작물들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채색을 하니 예쁘다. 



살짝 마른 얼굴을 한 직원이 별 표정없이 자리를 안내하고, 두어가지의 메뉴를 추천하고 사라졌다. 그래도 이 시즌에는 반가운 외국인 손님일텐데 다소 담백하다고 느꼈다. 조리실의 따뜻한 공기가 끼쳐오니, 약간 허기가 밀려온다. 빠르게 고른다. 우동, 카레, 카츠, 그리고 우유 한 잔을 한 상에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가족 사진을 마주보고 식사할 수 있는 소박한 모습의 테이블





다시금 풍부해지는 '우동 한 그릇'의 정서


비에이 우유 한 잔이 끼어있는 세트 메뉴가 귀엽다는 인상외에는 메뉴 자체의 비주얼은 참으로 보통(이거나 그 이하)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우유를 한 입 머금고, 큰 기대 없이 식사를 시작해본다.


통통한 면가락에 따뜻한 카레를 끼얹고 우물거리는데, (정말로) 작게 탄성을 뱉었다. 실로 음습했던 4월의 홋카이도 날씨 속에서 조금은 지쳐있었던 것인지, 온 몸이 포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결국, 카레 한 스푼도 남기지 않고 클리어해버린 점심이다. 양배추와 함께 먹는 미니카츠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다. 담백한 인사는 자신감이었던가요..?  꼬소한 우유가 식사 앞뒤에서 참으로 기특하게 역할을 해낸다.


우동과 카레를 대접에 각각 담고, 미니 카츠와 비에이 우유 한 잔을 곁들인다.


통통한 면가락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또 "우동 한 그릇"의 정서는 풍부해진다. 따뜻하게 속을 데우는 데에는 역시 우동만한게 없다. 그동안은 국물에 기댄 부분이 없지 않은데, 이제는 면의 질감만으로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완벽한 한 끼다. 시장이 반찬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음식이었다면 이렇게 행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금 예찬을 더한다. 누가 뭐래도 우동, 우동이다. 



잘 먹고갑니다- 하고 읊조리며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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