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화첨과실>
내가 새롭게 만나는 도시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해 그 도시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로 '미리보기'를 하곤 한다.
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뜻밖의 바이오리듬 탓에 영화 한 편이 필요해졌다. 유난히 피곤한 채로 도착한 타이베이의 오후, 그렇게 헐렁거리다가 밤이 되어서는 잠이 오지 않아 넷플릭스를 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만 영화 한 편을 보고 자기로 한다.
화면을 쭉 스크롤하다가 픽한 영화는 다름 아닌 <나의 소녀시대>. 대만의 청춘스타 왕대륙의 대표작으로 유명하지만, 워낙 대만 영화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다. 평소에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나 있던 이 영화를 재생하고, 침구를 삐딱하게 받친다.
누구에게나 있는 '소녀시대'의 고교연애담이 역경과 장애물을 굽이굽이 넘어 열린 결말을 향해 가는 흐름. 한국의 <응답하라> 시리즈와 많이 닮아 있는 플롯이다. 유치하거나, 뻔하다고 예상했지만, 막상 씬의 구성과 캐릭터들의 입체감에 러닝타임은 꽤 순식간에 지나간다. 이글이글한 남주 왕대륙은, 개인적으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걸륜보다 설렘을 주는 캐릭터다.
같이 별을 보고, 맞은편에 없는 서로를 생각하면 펑펑 울기 시작할 무렵에는, 어느새 내가 소녀의 연애담에 어울리는 타이베이의 묘한 색채에 기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왁자지껄하거나, 이국적인 것들이 예상치 못하게 섞인 도시'라는 인상 외에 하나의 이미지가 추가된 셈이다. 도시에 대한 감각이 더 트이는 순간이다. 이 놈의 바이오리듬 덕에 타이베이에 대한 설렘이 더해졌다.
엔딩크레딧까지 깔끔하게 시청한 뒤 푹 자고 일어난 날은, 둥취 지역을 둘러볼 요량이었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고 거리로 걸어 나가는데, 도시의 낯빛이 심상치가 않다.
여전히 낯선 타이포와 건축물들이 이질감을 주지만, 하늘과 건물의 타일이 만나서 뿜는 조화로움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건물 화단에 귀엽게 심은 예쁜 색깔의 이름 모를 꽃도 더 잘 보인다. 언제부터 숨어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모를 각자의 사연과 감성을 간직한 편집샵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고 있다. 로맨틱한 컬러로 무장한 디저트 가게들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좋아 보인다.
게다가, 미세먼지가 낀 것도 아닌데 몽롱한 기운을 주는 도시의 개체들이 유난히 존재감 있게 보인다. 이른 아침부터 새벽녘까지 대량으로 부릉거리는 오토바이 부대와, 그 뒤로 깔리는 거대한 건축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율동감을 느껴버린다. 도시의 풍경을 면면이 보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가 않다니요.
신명 나게 도시를 돌아다닌다. 둥취 지역을 벗어날 때쯤, 한 잔의 여유를 부리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오늘 이 도시가 이렇게 사랑스럽다면 그에 걸맞은 주스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소녀소녀한 것이어야만 하겠어.
비주얼이나 맛으로나 별로 빈틈을 보여주지 않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화첨과실(花甜果室)>의 주스를 찾았다. 도시의 다른 면을 깨달은 날답게 뜨뜻한 차나, 두꺼운 딤섬을 먹는 것은 내키지 않았달까. 대단히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 한 가게와 메뉴의 모습도, 오늘자 여행자의 감상(이자 감성)을 기록하기에도 적합하다.
어제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밤과, 한 번쯤 상상하던 치명적인 소녀의 연애, 그때부터 달라진 타이베이의 낯빛, 오늘자 도시의 아기자기한 개체들, 그리고 지금 내 앞의 이 베리가 잔뜩 들어있는 주스까지. 더없이 완벽한 오후에 이르기 위한 여정이었다. 오늘 정도는 이 감성에 조금 취해 있어도 괜찮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