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을 입었으니 깨를 베자

by 화산대폭발

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지신 건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장판 열로 인한 허벅지 부근의 약한 화상이 욕창이 되었고, 별 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 한 할아버지께서는 금방 돌아올 줄로 아셨으리라. 허벅지의 큰 검은 반점을 가족이 발견하고 나서야 방문한 병원에서 욕창이라고 진단받아 치료를 하셨다. 그 이후로 건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손자는 할아버지께 전화를 한 번 드렸고, 받는 목소리는 안 좋으셨다. 말을 하시는 것도 힘드셨는지 전화를 급히 끊고 싶어 하셨다. 할아버지, 금방 제가 찾아뵐게요, 하니 "언제!" 하며 금세 큰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안도감에 웃음이 났다. 추석에 찾아뵈어야지, 할아버지. 내년에 저랑 낚시 꼭 가요. 곧바로 "그래라!" 하셔서 웃음 머금고 할아버지 금방 봬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직도 동네가 떠나갈 듯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직 많이 정정하시네, 생각이 들어 기분이 편안했다. 그렇게 꼭 2주 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기나긴 추석 연휴가 막 시작된 토요일이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어째서 나는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차분한지 생각해 봤다. 소식은 점심에만 해도 할아버지 드실 찐빵을 살 것인데 너도 먹을 거냐며 전화를 해왔던 누나로부터 한 시간 만에 다시 전화로 왔었다. 놀라지 말라며 운을 띄운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놀라지 말라고 했던 덕분이었을까? 난 침착하게 내 짐을 챙겨 일어나 집에 들러 옷가지를 가방에 담으며 내려가는 버스를 타려면 몇 시 차를 타야 할지 시간을 계산했다.

버스가 한 시간쯤 달렸을까, 침착함에 죄책감을 느끼던 중 별안간 코피가 났다. 당황하며 코를 틀어막으며 뒷목 가운데를 지그시 눌렀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코피가 자주 났던 내게 할아버지가 알려준 대처법이었는데 피를 멎게 하는 혈자리라고 하셨던가, 왜 굳이 뒷목을 누르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제야 눈물을 조금 흘렸다. 다들 잠든 오후의 버스 안에서 코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버스에 피가 묻지 않게, 아무도 깨우지 않게 숨을 죽였다. 기다리다 도착한 휴게소에서 손을 씻었다. 담배를 피우는 손에서 짠내가 났다.


장례식은 아무리 현대사회라지만 무섭도록 놀라운 수준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가족들은 긴 연휴로 추석을 미리 준비하던 덕분에 자정이 되기도 전에 모두 모였다. 퇴근하기 전에 상복을 빌리라는 장례식장 직원의 재촉에 다들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독경을 하고, 할아버지의 수의를 전달하고, 분향실과 상주실 이용 수칙을 안내받고, 음식들의 영수증과 비치된 물품을 확인하며 하루가 지났다. 종종 너무 빠르고 많은 요구들에 혼란스러웠지만 장례를 치르는 이 장례식장에서 근무하셨던 큰삼촌의 지휘 덕에 그나마 수습할 수 있었다. 제물상 위에는 찐빵이 올라있었고 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의 입관 이후로 얼이 빠진 가족 모두가 점심을 씹으며 슬슬 기운을 차리고 있던 무렵, 대화들에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추억을 날린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당시 어머니는 초등학교 등굣길을 할아버지와 자전거로 함께 했는데, 그렇게 등교할 때마다 주변의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이 흠칫 놀라며 엄마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더랬다. 어머니는 영문도 모른 체 꾸벅 고개를 숙여가며 인사를 받아주면서도 왠지 의기양양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앞 갈림길에 도착해 자전거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가니 할아버지가 크게 인사해 주고는 바로 옆의 중학교로 들어가시더란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다니던 백운초등학교는 바로 옆 백운중학교와 갈림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었고, 백운중의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옆을 지나가니 놀란 중학교 학생들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도 할아버지와의 등굣길은 어깨부터 올라갔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두 분의 첫 만남부터 회상하셨다. 이 가족은 진안 백운의 막내와 마령의 막내가 선으로 만나며 시작됐다. 할아버지 나이 스물셋, 할머니의 나이 스물이었다. 할머니는 처음 할아버지를 만난 선 자리를 회상하시며 '무슨 남자가 이렇게 곱상하게 생겨서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고 하셨다. 알아주는 주당가였던 할머니 집안과는 다르게 술을 전혀 못 하시던 할아버지 때문에 할머니는 아쉬우면서도 고운 외모 값을 한다고 생각하셨고, 술 없이도 두 분의 사이는 언제나 좋으셨다. 이후로 장녀, 장남, 차녀-나의 어머니-, 삼녀, 차남을 낳았다. 다섯 남매를 보며 시간이 흐른 뒤에도 두 분의 사이는 무게 잡는 일 없이 언제나 귀여우셨다. 서로의 콧털이나 눈썹을 깎아주고, 과일 따위를 직접 입에 넣어주기도 하셨다. 입에 넣으면서는 과일 대신 손가락을 집어넣는 장난을 자주 치셨다고 한다. 돌아가시던 날의 아침식사에서 할아버지는 샤인 머스캣을 주시려는 할머니의 손가락을 오랜만에 앙 물으려 하셨고, 이를 본 할머니는 반가워하며 당장에 나의 어머니에게 전화해 ‘아버지가 기운을 많이 차리셨으니 아버지 드실 간식거리를 사와라'고 말씀하셨다. 가족 중 누구도 이 일이 이토록 급작스레 벌어지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토요일, 일요일 지나 월요일에 발인을 해야 했지만 명절 당일에는 승화원이 쉬는 탓에 4일장을 치렀다. 여전히 부슬비가 내렸고 명절 탓이었는지 조문객은 많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가족들끼리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우리는 충분히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오래도록 아프시지도 않았고 어떻게 가족이 모일 추석에 돌아가셨느냐며, 다들 함께 모여 힘들게 하지 않으려는 뜻 아니었겠냐며 서로를 위로했다.


정신없이 일어난 발인날, 승화원은 의외로 사람이 몰렸다. 예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던 곳이었지만 같은 곳이었던가 싶을 만큼 확장과 리모델링을 했는데, 오히려 절차와 동선이 간소화되면서 사람 냄새는 적어졌다. 장례지도사는 익숙한 듯 빨리 진행하고자 접수와 안내를 해줬지만 우리에게 애도의 시간은 충분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운구차가 들어와 한시바삐 진행해야 한다며 수골의 과정도 매우 짧게 끝이 났다. 우리의 슬픔이 누군가의 업무에 대한 장애로 취급되는 것은 미안하면서도 서운했다.

진안에 돌아와 큰할아버지 옆 미리 준비된 자리에 할아버지를 모시는 중 지관과 주변 인부들은 계속해서 재촉했다. 비는 그쳤지만 언제 다시 내릴지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빨리 하라는 둥, 흙을 어떻게 뿌려드리라는 둥 말씀이 많았다. 할머니는 수많은 재촉으로 눈물 흘릴 시간을 잃은 채 허망한 눈빛이셨고, 우리는 혹여나 큰 소리를 내면 할아버지를 제대로 모셔주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려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조금만 천천히 하자며 부탁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덮은 흙더미를 향해 가족들이 인사를 끝내니 주변 인부들은 어서 내려가라 성화였다. 등쌀에 밀리면서 결국 한 소리를 했다. 우리 할아버지 담배 하나 드려야 한다고. 할아버지의 유골함 위로 담배 하나를 놓아드리고 묫자리를 떠났다. 쫓겨나듯 내려가며 돌아본 할아버지의 담배 연기가 향과 다를 것 없었다.

묫자리를 내려와선 먼 거리로 인해 미처 장례식에 방문하지 못하셨던 마을 사람들을 위해 회관으로 허둥지둥 음식을 날랐다. 어르신들의 식사를 돕고 급히 자리를 만들어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자마자 할머니는 큰삼촌과 함께 마지막으로 장례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원불교당으로 가셨고, 집안 어른들은 회관에 남아 마을 어르신들을 도왔으며 손주들은 각 차 트렁크에 실린 짐들을 챙겼다. 할머니 집에 모여 장례를 치르느라 여기저기 구분 없이 챙겼던 가족들의 물품들을 정리하고 나니 이제 정말 끝이 났다. 모두가 지쳤다. 4일 내내 입은 상복에서는 냄새가 났고, 인원이 많은 탓에 제대로 씻고 말리지 못 해 다들 머리는 우스웠다. 드디어 익숙한 공간인 할머니의 집 마루에 누워 양말이라도 벗으니 나른함이 몰려왔다. 할아버지와의 작별을 생각할 새 없이 몸이 한계였다. 손주들은 핸드폰을 꺼내 각자가 가진 할아버지의 사진을 자랑했다.

다들 드러누워 할아버지 사진을 보는데 이모가 급하게 들어와 마당의 배를 따자고 하셨다. 마당의 배나무는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것으로 매년 이쁜 배를 골라 각 집으로 보내시곤 했다. 그랬던 나무도 한 달은 넘도록 할아버지의 관리를 못 받으니 배는 물러졌고 온갖 벌레가 꼬였다. 더 이상 두면 몸도 불편하신 할머니께서 그것들을 정리하느라 힘드실 것이 뻔했지만 예전에 몇 번 배를 따 본 손주들은 조금만 이따 하면 안 되겠느냐며 힘듦을 토로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오시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말에 또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향했다. 막상 마당으로 나오고 보니 배나무와 대추나무는 서너 명만 붙으니 충분했다. 놀게 된 남은 인원을 이모가 보시더니 그럼 깨를 베자고 하셨다. 비가 더 내리면 익어버린 깨가 다 떨어지거나 썩어버릴 거라 할머니는 지금 깨를 베고 싶어 하실 텐데 할머니가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에 다시 낫을 찾아 움직였다.

깨밭은 심란했다. 깨는 허리께 위로는 자라 있었고, 비 때문에 밭이 젖어 딱 보기에도 질척했다. 급히 나온 탓에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손주들은 난감했다. 어느새 큰삼촌이 오셔서 깨를 베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다.

"상복이라도 갈아입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상복을 입었으니까 지금 해야 돼. 옷 갈아입고는 못 해. 상복은 어차피 업체에서 빨을 거니까 상복 입고해"

삼촌의 말에 상복 차림의 손주들은 일단 부족한 장갑을 왼손에 하나씩 나눠 끼고 깨밭을 들어간다. 깨가 익어 기울어진 줄기를 장갑 낀 손으로 움켜쥐고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아래쪽을 발로 지그시 밟는다. 나중에 깨를 털기 편하도록 큰 가지를 자르지 않고, 잔 가지를 모아 한 번에 베어낸다. 낫은 깨를 벨 때 깨가 떨어지지 않도록 아래에서부터 비스듬히 단숨에 벤다. 베어낸 깨는 말린 다음 털어야 하기 때문에 한아름 정도로만 쌓이도록 베어낸 자리에 뉘여둔다. 머리로는 알겠어도 막상 직접 하니 쉽지 않았다. 깨의 줄기는 생각보다 억세고 낫은 무뎌서 수많은 깨를 바닥에 다 떨구고 나서야 감을 잡았다. 허리 숙여 베어내고 있으려니 그만하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할머니는 마을 회관에서 밭을 향해 아직 깨 베면 안 된다고 소리치셨지만, 회관 앞 정자에 계시던 마을 어르신들이 그 말을 듣곤 곧 비 내리니까 지금 베어야 한다고 다시 맞받으신다. 결국 수긍하신 할머니의 허락 뒤로 다시 손주들은 깨밭 사이로 사라진다. 베어낸 깨를 베어낸 자리 위로 쌓고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며 깨를 벤다. 땀이 바가지로 흐른다. 눈에 땀이 들어가 잠시 허리를 펼 겸 일어나니 온 가족이 깨밭을 둘러싸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베면 안 된다며 큰 이모는 급히 밭으로 들어오셨고, 할머니도 참다 참다 답답하셨는지 깨밭으로 오고 계셨다. 우리는 결국 다 같이 깨밭에 모여 누가 깨를 가장 잘 베느냐며 너스레 떨고, 답답한 마음에 낫을 내놓으라며 성화도 냈다. "나 잘하고 있는데 왜!"라는 누군가의 토로 뒤로 말없이 할머니는 바닥에 떨어진 깨들을 바라보시고, 각자 내 자식 잘한다며 칭찬하기 바빴다. 나는 벌떡 일어나 왜 아무도 나는 칭찬해주지 않느냐며 소리 내자 온 가족의 눈빛을 받으며 우리 재현이가 제일 잘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다시 허리 숙여 깨를 베어냈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소리 낼수록 우리의 손은 바빠졌고 비가 내리기 전에 결국 깨를 다 베었다. 깨를 적당히 잘 펼쳐두고 그 위로 그늘망을 덮고 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다. 할머니에게 할머니만 나 칭찬 안 해줬다며 응석을 부리고 나서야 할머니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러나저러나 깨를 베길 잘했다 하며 웃으셨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할머니 집으로 부리나케 향했다. 우리는 깨를 베고 나서야 상복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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