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를 본 사람이다.
20250301(아직도 18일차)
남아메리카 - 아르헨티나 - 부에노스아이레스
엘 모누멘탈에 입장해 착석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이 경기장은 이미 리버플레이트 팬들의 텐션으로 꽉 차 있다. 보통 클럽 경기를 보러 오면 원정 팬들의 모습도 보이기 마련인데 여긴 정말 찾기 힘들다. 심지어 골대 뒤쪽에 위치한 응원석은 모두 스탠딩석이라 8만 5천 명보다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의 응원 소리는 지금까지 어느 경기장에서 본 것보다 인상적이었다. 정말 인생을 축구에 모두 던져버린 사람들만 모인 것인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세계 어디서든 클럽 경기를 보면 응원가는 주로 응원석에서 서포터즈들이 주도하고 부르는데, 유럽처럼 여긴 그런 구분이 없다. 이미 조부모부터 최소 3대에 걸쳐 한 팀의 팬이고 역사는 길기 때문이다. 유럽 축구장과의 차이점은 관중이 더 열정적이라는 것. 이들이 이 클럽을 사랑하면서도 나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는데, 아마도 이는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들이 아주 거칠고 공격적인 축구 플레이 성향을 가진 이유라 생각한다. 상대 선수들에 대한 매너보다 본인의 승리에 대한 열망, 포기하지 않는 모습 등을 팬에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관중들을 보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면 정말 살인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경기장 내에는 코를 찌르는 담배와 마리화나 냄새가 진동한다. 아주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의학적 용도 외에는 불법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 참 희한할 노릇이다. 스페인에서도 종종 마리화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스페인어권 국가들은 어느 정도 풀어주는 모습인 듯 하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호주에서 길거리에서 마리화나 파는 사람들은 죄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이들도 많은데 이런 흡연에 대해 딱히 부정적인 인식은 아닌 듯하다.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경기장 얘기로 다시 돌아와서 담배와 마리화나를 제외하고는 이 경기장 분위기가 너무너무 부럽다. 나는 이것을 보러 온 것이고 이들은 이를 충족시켜주었다. 물론 경기력은 엉망이었고 결과도 패배였지만 이 광경은 아마 한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정원이 약 6만 8천 명인데 몇 년 전 브라질 국가대표 초청 경기 때 6만 명이 넘은 그 경기가 내가 본 최대 관중이었다. K리그가 점점 인기가 많아지고 있긴 하지만 국내 리그 경기에서 이 정도의 관중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국가대표 경기도 저 정도의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콘텐츠는 간혹 되긴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나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최대 인기 스포츠인 야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그게 안 돼서 앰프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인들은 콘서트는 그게 되는데 프로 스포츠에서는 되지 않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는 작용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 전체가 이상할 정도로 축구에 광적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아주 국민들을 다루기 쉬울 것 같다. 지금 축구를 보러 오는 30~40대 연령층의 조부모라고 해봤자 40~50년대 생이고, 그들의 경제 활동을 하던 시기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시절이다. 그 와중에 1978년과 1986년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고, 혼란하던 군부 독재에 전 국민이 축구로 하나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2022년도 마찬가지이다. 나라는 나아지는 것이 없지만 주기적으로 전 국민에게 축구 열기가 주입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긴 한데 이런 식으로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작업은 아주 오래되고 효과적인 정치 방식이다. 게다가 월드컵 우승이라니. 아주 특별한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경기장에서의 이 전체적인 열정적 모습은 슬프게도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꼭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다.
한 바탕 축제 같은 경기가 종료되고 썰물처럼 몇만 명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우리의 리더 아멜의 의견에 따라 다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다. 기가 이미 빨릴 대로 빨린 한국인 친구와 가이드 후안메는 여기서 작별했다. 또 어딘가에서 마주치길. 경기가 밤 9시 반이 가까워져 끝났으니 상당히 늦은 시간이지만 오늘 처음 본 이 친구들과 그냥 작별하기는 확실히 좀 아쉽긴 하다. 우리는 경기장에서 떨어진 곳으로 좀 더 이동하여 루프탑 펍에 들어갔고 몇 시간 만에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고 한바탕 시끌벅적한 축제가 끝난 뒤라 역시 대화는 뒤죽박죽이다. 밤도 늦었고 무리할 필요가 있나 싶어 대부분 맥주를 주문했는데 노르웨이 친구 둘은 위스키를 시킨다. 아 역시 북유럽인들은 도수가 낮은 술을 못 먹는구나. 대학생 때 핀란드인 친구와 친했는데 그 친구도 생각해보면 맥주 먹는 것은 못 보고 최소한 소주였다. 도수가 낮다며. 그렇지만 늘 과음으로 취해있었던 모습만 본 것은 우연일까.
우리 8명은 제각각 대화를 한다. 공통 주제로 얘기하나 싶었다가도 집단적 독백이 되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 4명, 미국 1명, 북유럽 2명, 한국인 1명의 보기 힘든 조합은 사실 공통 주제를 찾기 쉽지 않다. 보통 이럴 때는 어떤 주제가 나오면 너네 나라는 너네 문화는 어때? 이런 식의 흐름이다. 그러면 공통 주제는 남미여행, 코로나, 음식, 축구 이 정도로 압축되는데 그냥 재미있다. 뭐 진지한 얘기할 것도 아니고. 미국인 브라이언과 나머지는 축구가 싸커(Soccer)냐 풋볼(Football)이냐로 한창 논쟁했다. 미국인들한테 풋볼은 미식축구를 보통 말하며 우리가 아는 축구를 싸커로 구분한다. 본인은 보통 아이스하키(NHL)나 미식축구(NFL)을 보는데 픽하면 쓰러지고 아픈척하는 싸커는 도대체 왜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는거냐고 묻는다. 그럼 여기에 긁힌 나머지 사람들이 미국 우선주의를 비난하며 한바탕 노는 식이다. 그러면서 대화는 관람한 월드컵의 역사로 넘어가 2002년 한국의 월드컵 심판 매수부터 해서 2018년 한국이 독일을 잡아준 덕분에 멕시코가 16강에 진출한 얘기, 2022년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하면서 브라질의 체면이 구긴 상황 등을 얘기했다. 또 신기한 것은 한국의 바베큐 문화가 또 나온다. 고기를 왜 손님들이 직접 구워 먹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가지만 재밌고 신선하다는 반응. 웃기다 그것 참. 중간에 노르웨이 친구들은 먼저 떠났다. 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숙소로 갈 우버를 못 잡을까 봐. 해외여행에선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놈들 위스키를 시켜놓고 돈은 안 주고 갔다. 온전히 남은 사람들의 몫. 그래 그래 기분 좋게 넘어가자.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가 서로의 SNS를 교환하고 집으로 간다. 그 시간이 한 새벽 1시쯤. 어느 나라든 밤까지 술을 마시면 12시 전에 들어가는 그런 것은 없나보다. 한국에서도 11시쯤 끝내고 막차를 타면 저렴하고 안전하게 집에 갈 수 있는데 굳이 한 두 시간을 더 마셔 비싼 택시비를 내고 집으로 향한다. 여기서도 똑같은 것을 보니 다 비슷한가 보다. 아무래도 12시 종료는 정이 없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