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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제야 만난 부에노스아이레스(1)

곳곳에 보이는 아르헨티나의 민낯

by mong

20250301~0304 (18~21일차)

남아메리카 - 아르헨티나 - 부에노스아이레스


야자수를 제외하면 영락없는 유럽 도시 모습이다.

아, 이제 몸을 쓰는 힘든 일정은 이번 남미 여행에서는 더 이상 없다. 아, 이과수 폭포도 힘들까? 이 여행의 마지막 파트인 세 번째 파트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도시들, 그리고 이과수 폭포만이 남았다. 이과수 폭포를 제외하면 남은 일정의 대부분은 도시에서의 휴식이다. 여러 여행 경험상 도시에서는 크게 할 것이 없다. 도시가 도시지 뭐 별게 있겠는가. 물론 그 도시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내가 아는 한 남미에는 그런 도시가 별로 없다. 단지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식민지 정부가 필요에 의해 세운 도시 인프라인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도 아주 중요한 인류의 근대 문화유산이지만 나에게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라는 뜻이다. 점심쯤 도착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어떻게 보면 그 의미에 가장 적합하고 유명한 도시이다. 이곳은 아주 식상한 표현으로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데, 와보니 그 이유를 단번에 알겠다. 정말 파리와 비슷하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개인적으로는 파리 도시의 외관과 해안도시 바르셀로나를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다. 정말 몇 군데 사진을 찍어놓고 파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사하고 화려하다. 이 유럽식 도시는 어찌 보면 파리보다 더 파리 같을 것이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지 않고 20세기 초반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루의 리마나 칠레의 산티아고의 느낌과는 또 다르다. 리마와 산티아고는 식민정부의 주요 중심지만 유럽식으로 해놓은 정도로 보이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시의 대부분이 정말 말 그대로 근대 유럽식이다. 낮고 규칙적인 건물들에 디테일한 유럽식 조각, 심심하면 보이는 아르헨티나 유명인의 유럽식 조각 작품들 등. 마치 자신들의 유럽적인 정체성을 누가 의심이라도 하면 안 된다는 듯이 곳곳이 유럽으로 도배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곳의 특이점이 없다고 볼 수도 있는데, 사실 이 점이 이곳의 특이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곳곳에 보이는 '말비나스' 기념물

20세기 초 유럽의 정치적 불안과 세계대전으로 인해 이주한 유럽인들로 새로운 안식처가 된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부국이`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가져온 부와 이곳에 있던 풍부한 천연자원, 지리적 입지의 강점 등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말았다. 부는 분배되지 못하며 일부에게만 편중된 데다가 잦은 군부 쿠데타로 인한 정치 불안정으로 그 짧은 전성기를 마감하고 이곳엔 과거의 영광만 남아 있다. 물론 여전히 거대한 잠재력은 남아있지만 영원한 라이벌인 이웃 국가 브라질에 한참 밀리는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런 모습은 솔직히 말해 1900년대 초의 영광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상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겉면은 화려하지만 곳곳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는 수많은 부랑자들과 코를 찌르는 소변 냄새, 낡디 낡은 도시의 인프라들은 그 사실을 대변한다. 도시 곳곳에 보이는 `말비나스` 기념비도 사실 이것들과 궤를 같이한다. 우리에게는 포클랜드로 익숙한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말비나스라 불리는 이곳은 아르헨티나 남쪽에 위치한 큰 섬으로 영국이 점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과거 이곳을 무력으로 침공한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고, 아주 잠깐 이곳을 점거했으나 이내 영국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그 이후로 축구에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이 잉글랜드와 만날 때마다 제2의 포클랜드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아르헨 정부는 외부에 적을 만들어 내부를 안정화시키려는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말비나스를 선전하며 시선을 자꾸 밖으로 돌리려 한다. 포클랜드의 거주민 절대 다수가 영국 통치하에 있는 것을 원한다는 투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이 차고 넘치는 산 텔모 시장

그렇지만 이 도시가 그렇게 우울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도시에 꽤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왔다. 말로만 듣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곳에서 지낼 시간과 보러 갈 축구경기, 이 도시의 분위기 등 많은 것들이 기대됐다. 앞서 말한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에서 손 꼽히는 큰 도시이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 내 관광지구와 일명 힙한 거리에는 활기가 넘친다. 아마도 이런 유럽식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완벽한 곳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아르헨티나인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백인 우월주의에 인종차별을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말이다. 20세기 초 유럽인들은 전 세계 곳곳 식민지 개척이 극에 달해 서로 싸우고 있던 시절에 인종적인 유럽인들의 우수성을 피력하며 우생학이라는 유사과학도 나오던 지경이었다. 아르헨티나는 그 당시의 백인 유럽 부유층들이 이민해 온 국가인 것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본토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과거의 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로 이민을 간 한국인들이 1970~2000년대 한국 문화에 더 익숙한 것도 그 궤를 같이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변화가 상당히 빠른 문화로 어찌 보면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그 이민의 역사가 100년이나 되지 않았는가. 다만 실제로 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내가 가진 편견이 무참히 깨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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