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라는 흉기 앞에 무릎 꿇다
시계를 10년 전, 2016년으로 되돌려보자.
그때 나는 갓 개원한 풋내기 원장이었다.
당시 내 통장에는 '마이너스 2억 원'이라는 빨간 숫자가 찍혀 있었다. 개원을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은 빚이었다.
지금이야 수의사 처우가 조금 나아졌다지만, 당시만 해도 상황은 암울했다. 페이 시장은 좁았고 급여는 박봉이었다. 만약 이 병원이 망한다면? 나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2억이라는 빚을 갚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공포.
그 절박함이 나를 매일 새벽 병원 문을 열게 만들었다. 나는 찾아오는 환자 한 분 한 분에게 목숨을 걸고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심'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사건 1. 진실을 삼키게 만든 빚의 무게
어느 날 오후, 한 중년 여성 보호자가 병원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 병원 카운터에는 샴푸나 간식 같은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모든 제품에는 가격표가 선명하게 라벨링 되어 있었다.
"이건 얼마예요?"
"네, 그건 15,000원입니다."
"그럼 저거는요?"
"저건 8,000원이고요."
그녀는 가격표가 뻔히 붙어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질하며 물어봤다. 바쁜 와중에도 직원은 웃으며 응대했지만, 질문이 10개 넘게 이어지자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보호자님, 제품 하단에 보시면 가격표가 다 붙어있습니다. 편하게 보셔도 돼요."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지금 나보고 글씨 읽으라는 거예요? 여기 직원 교육이 왜 이래? 사람이 물어보는데 귀찮아요? 불친절하네 진짜."
그녀는 씩씩거리며 나가버렸다. 나는 직원에게 "진상 손님 한 명 왔다 간 셈 치자"며 다독였지만, 진짜 악몽은 며칠 뒤 시작되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였다.
"우리 집 강아지가 노령견인데... 안락사 좀 시키려고요."
우리 병원 기록에는 없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아지였다.
당연히 거절해야 했다. 수의사법상, 그리고 윤리적으로도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보호자의 말만 듣고 생명을 끊을 수는 없다. 직원이 매뉴얼대로 안내했다.
"보호자님, 안락사는 저희가 마음대로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의학적 기준에 맞아야 하고, 원장님이 직접 진료를 보셔야 가능합니다."
"아니, 내 개 내가 보내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늙어서 똥오줌도 못 가리고 힘들어한다니까?"
그녀는 한참 동안 화를 내다가 전화를 뚝 끊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지역 맘카페와 블로그가 발칵 뒤집혔다.
제목부터 자극적이었다.
[피눈물 납니다... 위급한 아이를 외면한 XX 동물병원 때문에 우리 강아지가 죽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안락사'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은 쏙 뺐다.
대신 우리를 '위급한 환축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죽게 만든 무능하고 비정한 병원'으로 둔갑시켰다.
"아이가 숨이 넘어가려고 해서 다급하게 연락했습니다. 응급처치라도 알려달라고 사정했지만, 자기네 환자가 아니라며 매몰차게 거절하더군요. 결국 골든타임을 놓친 우리 아이는... 제 품에서 싸늘하게 식어갔습니다."
완벽한 소설이었다. 댓글창은 "살인 병원", "돈밖에 모르는 의사"라는 비난으로 도배되었다.
억울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장이라도 "해당 보호자분의 환축은 본원에 내원한 적이 없으며 응급조치에 대해 물어본 적도 없습니다. 단지 안락사 대한 부분만 물어보셨습니다"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멈칫했다.
내 머릿속에 '마이너스 2억'이라는 숫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여기서 싸우면? 그녀는 더 악랄하게 공격할 것이고,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다. 환자가 끊기면 이자를 못 낸다. 병원 문을 닫아야 한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밥줄이 끊길까 봐 두려워, 진실을 알고도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소주를 들이키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가진 게 없다는 건, 죄가 없어도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구나.
#사건 2. 50만 유튜버와 좌표 찍기
시간이 흘러 빚을 조금씩 갚아나갈 무렵,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이번 상대는 '블로그 글'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정부 지원 광견병 예방접종 기간이었다. 한 건장한 남성이 반려견을 데리고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근육질 몸매와 문신이 위협적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의료 고지 의무'를 다했다.
"보호자님, 접종 후 드물게 얼굴이 붓거나 구토, 심하면 쇼크 같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 지켜봐 주시고 이상 있으면 바로 오셔야 합니다."
그는 별말 없이 돌아갔다. 그런데 한 달 반이 지난 어느 비 오는 날, 전화가 걸려 왔다.
"야! 나 누군지 알아? 구독자 50만 유튜버야. 너 오늘 내가 죽여버린다."
황당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때 네가 부작용 설명할 때, 재수 없게 말해서 기분이 나빴다."
한 달 반 전의 일이, 단지 기분이 나빴다는 이유로 죽을죄가 된 것이다.
30분 뒤, 그가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대기실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원장 나와!! 어디 손님한테 저주를 퍼붓고 있어?!"
내가 나가서 진정시키려 하자, 그는 내 멱살을 잡을 듯이 위협했다. 헬스로 다져진 거구와 험악한 문신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이러시면 경찰 부르겠습니다."
"경찰? 불러! 아줌마들! 여기 다니지 마요! 여기 원장 싸가지 없고 내 개 죽일 뻔했어!"
그는 대기실 손님들을 다 쫓아내고는, "인터넷에 올려서 망하게 해 주겠다"는 저주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날 밤부터 '디지털 테러'가 시작되었다.
그의 블로그, 유튜브 커뮤니티, 지역 당근마켓에 악의적인 비방 글이 도배되었다. 50만 유튜버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권력이었다. 사람들은 사실 확인도 없이 그를 추종하며 악플을 달았다.
나는 변호사를 선임해 그를 고소했다. 긴 싸움 끝에 벌금형이 확정되었다.
법이 내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현실은 지옥이었다.
벌금 몇백만 원? 그에게는 껌값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반성 대신 교묘한 보복을 시작했다.
그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병원에 찾아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트집을 잡고 나가서는, 곧장 포털 사이트에 별점 1점 테러를 가했다. 소위 말하는 '좌표 찍기'.
법적으로 이겼지만, 내 병원의 평판은 걸레짝이 되었다.
매출은 곤두박질쳤고,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공포스러워졌다.
텅 빈 진료실, CCTV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의학적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나는 법을 지켰고 소송에서도 이겼는데.'
왜 내 병원은 망해가고 있는 걸까.
왜 나는 저런 무뢰한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나.
답은 하나였다.
나는 '힘'이 없으니까.
돈이 없어서, 이 병원 매출이 아니면 우리 가족이 굶어야 하니까.
그래서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그날, 나는 뼈저리게 결심했다.
더 이상 내 존엄성을 이런 식으로 짓밟히게 두지 않겠다고.
저들이 '구독자 수'와 '키보드'로 나를 공격한다면, 나는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압도적인 자본의 성'을 쌓겠다고.
내가 투자를 시작한 건 사치스러운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괴물들로부터 나를, 그리고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연재 안내]
해당 브런치북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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