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 위에 건물주, 그 아래 '인질'이 된 수의사

3억 5천만 원짜리 족쇄와 김 원장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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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2년 차, 병원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지옥 같던 '마이너스'의 늪을 건너, 드디어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숨통이 트이나 싶던 찰나였다.

하지만 2년이라는 계약 기간은 야속하게도 빨리 돌아왔고, 건물 관리인은 봉투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원장님, 건물주분이 이번에 임대료 조정을 좀 원하시네요."

봉투를 열어본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숫자는 내 예상을 비웃듯 가혹했다.


[보증금 대폭 인상 / 월세 200만 원 인상]


"네? 갑자기 이렇게 많이 올리는 게 어디 있습니까? 상가임대차보호법에 5% 제한 있는 거 모르세요?"

내 격앙된 반박에도 관리인은 난처한 척할 뿐, 눈빛만은 여유로웠다. 마치 '네가 법 찾는다고 뭐 어쩔 건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때,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야심 차게 개원했던 대학 동기, 김 원장의 얼굴이었다.

김 원장은 똑똑하고 강단 있는 친구였다.

1년 전, 그 역시 건물주로부터 터무니없는 월세 인상 요구를 받았다. 나와 달리 그는 "부당하다"며 법적 대응을 불사했고, 5% 상한선을 지키겠다며 건물주와 맞서 싸웠다.

당시 우리 동기들은 "역시 김 원장이다", "본 때를 보여줘라"며 그를 응원했다.

그는 승리한 듯 보였다. 건물주는 "알겠다"며 한발 물러서는 척했으니까.

하지만 진짜 지옥은 정확히 1년 뒤에 찾아왔다.

건물주가 내용증명 한 통을 보냈다.


[건물 노후화로 인한 대규모 리모델링 공사 예정. 안전상의 이유로 퇴거를 요청함.]


법적으로 건물주가 '안전'과 '재건축'을 핑계 대면, 세입자는 버틸 재간이 없다. 그것은 임대차보호법의 가장 악랄한 허점이었다. 김 원장은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소송을 걸어봤자 판결이 날 때까지 병원 영업은 마비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 원장은 개원한 지 4년도 채 되지 않아 쫓겨났다.

그가 새로 구한 자리는 기존 병원에서 차로 겨우 10분 거리였다. 누군가는 "10분 거리면 가깝네, 다행이네"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같은 수의사들에게 그 10분은 '죽음의 거리'다.

기존 환자들은 "병원이 없어졌다"며 떠나버렸고, 김 원장이 4년 전 바닥에 쏟아부은 인테리어비 2억 원과 각종 시설비는 허공으로 증발했다. 타일 한 장, 조명 하나 뜯어올 수 없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출을 더 일으켜 새 병원에 또다시 수억 원을 발랐다.

4년 만에 인테리어 비용만 두 번, 도합 4~5억이 깨진 셈이다. 그의 얼굴은 1년 새 10년은 늙어 있었다.

"원장님? 듣고 계세요?"

관리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기 김 원장의 파리해진 얼굴이 내 미래처럼 겹쳐 보였다.

동물병원은 대표적인 '장치 산업'이다.

나는 이 병원을 열 때 인테리어와 고가 의료 장비 구입에 총 3억 5천만 원을 쏟아부었다.

이 돈은 병원 문을 여는 순간 회수가 불가능한 '매몰 비용'이 된다.

건물주들은 이 생리를 귀신같이 안다.

처음에는 시세보다 싼 월세로 유혹해 3억 5천만 원을 바닥에 묻게 만든 뒤, 우리가 도망가지 못하는 '인질'이 되었을 때 빨대를 꽂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법을 따지며 버틴다면?


나도 김 원장처럼 1년 뒤 '리모델링'이라는 명분 아래 쫓겨날 것이다. 차로 10분 거리로 쫓겨나, 또다시 빚을 내어 병원을 짓는 악몽.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맞춰드리겠습니다. 대신 기간만 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나는 텅 빈 진료실을 둘러보았다.

번쩍이는 엑스레이 기계도, 깔끔하게 마감된 수술실 타일도 더 이상 내 자부심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것들은 나를 이곳에 묶어두는 족쇄였다.

내 돈 3억 5천만 원이, 나를 건물주의 노예로 만드는 인질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고, 아무리 환자가 미어터져도 소용없었다.


'내 땅'이 없는 사장은, 거대한 자본의 먹이사슬 가장 밑바닥에 있는 플랑크톤일 뿐이었다.


그날의 비굴함과 김 원장의 눈물이 내 뇌 구조를 바꿨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병원에 재투자하는 것?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건물주가 뺏어갈 수 없는 것, 리모델링 핑계로 쫓아낼 수 없는 나만의 성(城)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땅에 묻히는 돈이 아니라, 들고 떠날 수 있는 자본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한국의 골목길 건물주 따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테슬라 같은 미국의 1등 기업들에 내 자산을 옮겨 담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거대한 기업들은 나에게 "나가라"고 위협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내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는 인질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나를 위해 일해줄, 결코 무너지지 않을 미국의 심장부에 내 깃발을 꽂기로 했다.


해당 브런치북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홀수 화 (Odd): 자본주의를 정복하고 경제적 자유를 이룬 현재의 투자자 송원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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