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이 뒤바뀐 자영업의 정글
과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부부 클리닉 드라마 <사랑과 전쟁>을 기억하는가.
당시 시청자 게시판에는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다", "세상에 저런 막장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제작진의 인터뷰는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저희가 방송에 내보내는 내용은 실제 사연에 비하면 아주 양반입니다. 실제 제보된 현실은 차마 방송으로 송출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잔혹하고, 더 비참하고, 더 자극적이라 오히려 순화해서 각색한 것입니다."
오늘 내가 풀어놓을 김 원장, 박 원장, 강 원장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글은 내 주변 수의사들이 겪은 100%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읽다 보면 "설마 사람이 저렇게까지 하겠어?"라며 고개를 젓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둔다.
당시 현장에서 벌어졌던 고성, 오고 갔던 욕설, 그리고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들 정도로 치졸했던 그날의 '현실'은 이 글보다 훨씬 더 지저분하고 날카로웠다.
독자 여러분의 정신 건강을 위해, 그리고 차마 활자로 옮길 수 없는 비참함을 덜어내기 위해 상당 부분 '순화'하고 '각색'했음을 미리 일러둔다.
자영업의 정글에서,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본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체벌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숙제를 안 해왔다고, 떠들었다고, 혹은 선생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고 자랐다.
그때 선생님은 하늘이었고, 우리는 찍소리 못 하는 '을'이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자영업자 사장님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최저 시급은 고사하고, 일한 돈을 떼먹는 건 예사였다.
"야, 너 일 똑바로 안 해?"
고성과 막말은 기본 옵션이었고, 심지어 재떨이를 던지거나 손찌검을 하는 '막장 사장'들도 심심치 않게 뉴스에 나왔다. 동물병원 업계라고 다르지 않았다. 원장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그만두는 테크니션들의 이야기가 도시 괴담처럼 떠돌았다.
그런데 2026년 지금, 세상은 어떻게 변했나.
이제는 학생이 선생님을 때리고, 학부모가 교사를 고발한다.
자영업 현장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갑질 사장'들은 멸종했고, 그 자리를 '을질 직원'들이 차지했다.
세상에 '중간'은 없는 것일까.
과거에는 사장이 깡패더니, 이제는 직원이 상전이다.
내가 만난, 아니 우리 수의사들이 겪은 21세기 대한민국 자영업의 '매운맛' 현실을 공개한다.
내 지인 김 원장의 이야기다.
그는 1인 동물병원 개원을 앞두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나 홀로 진료를 봐야 하기에 손발이 맞는 직원이 절실했다. 다행히 면접에서 싹싹해 보이는 직원을 뽑았고, 오픈 3일 전부터 출근하게 했다.
김 원장은 '좋은 사장'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 아직 오픈 전이라 손님도 없으니 하루 9시간 계약이지만 3~4시간만 물건 정리 좀 도와주세요. 점심도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아, 급여는 당연히 9시간 풀로 쳐서 드립니다."
물품 정리하고 재고 파악하는 정도의 가벼운 업무. 게다가 4시간 일하고 9시간 급여를 주는 파격적인 대우. 김 원장은 이 정도면 직원이 고마워하며 열심히 해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픈 하루 전날 산산조각 났다.
퇴근 무렵, 직원이 불쑥 말했다.
"원장님, 저 내일부터 못 나오겠어요.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내일이 오픈인데? 당장 예약 환자도 있는데?
김 원장은 멘탈이 나갔지만, 꾹 참고 사정했다. 아니, 빌었다.
"선생님, 제가 뭐 서운하게 한 거 있나요? 내일 당장 오픈인데 갑자기 그만두시면 제가 어떡합니까... 제발 딱 3일만이라도 도와주세요. 그 사이에 사람 구할게요. 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시베리아 벌판보다 차가웠다.
"싫어요. 저 오늘까지만 할래요."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10분 뒤, 핸드폰이 울렸다. '띵동.'
[원장님, 저 3일 일한 거 급여 입금해 주세요. 9시간으로 계산하기로 한 거 잊지 마시고요.]
김 원장은 떨리는 손으로 인터넷 뱅킹을 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오픈 첫날부터 노동청 신고니 뭐니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4시간 일하고 도망친 직원에게 9시간치 급여를 꼬박꼬박 송금해주며, 혼자 텅 빈 병원에서 눈물을 훔쳤다.
내 동기 박 원장의 사례는 더 기가 막힌다.
어느 날부터인가 병원 재고가 맞지 않았다. 심장 사상충 약, 외부 기생충 약, 고가의 영양제들이 야금야금 사라지고 있었다.
"설마..."
박 원장은 떨리는 마음으로 CCTV를 돌려봤다.
화면 속에는 믿었던 직원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진열장에 있는 넥스가드와 영양제들을 능숙하게 자신의 가방에 쓸어 담고 있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박 원장은 직원을 불러 조용히 이야기했다.
"선생님, CCTV 봤습니다. 이거 뭡니까?"
직원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박 원장은 경찰에 신고하고 형사 고소를 할까 수천 번 고민했지만, 결국 관뒀다.
작은 동네 병원에서 경찰이 왔다 갔다 하고 소문이 나면 피곤해지는 건 결국 사장인 자신이었다.
"오늘부로 그만두세요. 훔쳐간 물건값은 급여에서 제하겠습니다."
그렇게 내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내 돈 주고 고용한 직원이, 내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이 되는 현실. 박 원장은 그날 이후 직원들이 가방을 들고 퇴근할 때마다 의심부터 하게 되는 자신이 싫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뼈아픈 건, 같은 전문직인 '수의사'에게 당하는 배신이다.
강 원장은 능력 있는 페이닥터(월급 수의사)를 영입했다.
"우리 병원을 잘 부탁합니다."
강 원장은 그를 가족처럼 아꼈다. 업계 평균보다 무려 30%나 더 높은 연봉을 줬고, 인센티브도 넉넉히 챙겨줬다.
얼마 후, 강 원장에게 경사가 생겼다. 임신과 출산이었다.
그녀는 병원을 믿고 맡긴 채 잠시 육아 휴직에 들어갔다.
"원장님,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제가 잘하고 있겠습니다."
그 수의사의 듬직한 말에 강 원장은 안심하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병원은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그 수의사는 강 원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병원의 핵심 고객 데이터, 진료 차트, 노하우 등 모든 정보를 빼돌렸다.
심지어 손발이 맞던 간호사들까지 싹 포섭해서 꼬드겼다.
그리고 강 원장의 병원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보란 듯이 개원했다.
"강 원장님네 병원? 거기 원장 출산하느라 진료 안 봐요. 여기로 오세요."
자신이 빼돌린 고객들에게 문자를 돌리며, 강 원장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30% 더 준 연봉은, 결국 내 등에 칼을 꽂을 자본금이 되어 돌아왔다.
김 원장, 박 원장, 강 원장... 이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다.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나오는 건 엄살이 아니다.
과거에는 사장이 '갑'질을 해서 문제였지만, 지금은 법과 제도의 보호 아래, 그리고 '을'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직원들의 횡포가 사장의 숨통을 조인다.
내가 1인 동물병원을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직원이 한 명 늘어날 때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인적 리스크(Human Risk)'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들은 언제든 오픈 전날 도망칠 수 있고, 내 물건을 훔칠 수 있으며, 내 노하우를 훔쳐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의 '선의'나 '성실함'에 내 운명을 걸지 않는다.
대신 나는 미국 주식을 산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테슬라... 이 거대한 기업들은 나에게 가불을 해달라고 조르지도, 물건을 훔치지도, 내 뒤통수를 치고 경쟁 업체를 차리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스템 안에서 나를 위해 돈을 벌어다 줄 뿐이다.
어릴 땐 선생님에게 맞고, 커서는 직원에게 맞는 세상.
이 지독한 '갑'과 '을'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자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뿐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해당 브런치북은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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