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정하다, 라는 의미의 '결심(决心)'. 결국 헤어짐의 마음을 정할 수 없어 영원히 결론을 내리지 않는, 미결(未决)로 만든 사랑.
종결되어 태워 사라지느니, 미결되어 가슴에 남고자 했던 사랑.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갖게 해 줘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그로테스크하게 들렸던 "'심장'을 갖고 싶어", 가 실제로는 "'마음'을 갖고 싶어",였던 것처럼 겉으로는 미스터리 수사극이지만,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갈망하는 절절한 멜로 영화였다.
한국어에 서툰 서래(탕웨이 役)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할 때나
해준(박해일 役)의 말하는 의미를 잘 모르겠을 때마다 번역 앱을 사용하는데,
그때마다 둘의 언어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묘하게 어긋나며
알듯 말듯한 둘의 관계의 시간(타이밍) 역시 미묘하게 어긋난다.
나는 '붕괴'가 되었다,라고 해준이 떠났을 때
사전에 '무너지고 깨어짐'이란 의미를 보고 나서야 해준의 마음을 알게 된 서래처럼,
'심장'을 갖게 해 줘, 라는 서래의 말이
사실은 '마음'을 갖게 해 달라는 말이었음을 한 발짝 늦게 알게 된 해준처럼.
둘의 사이는 '중단', '붕괴', '마침내'라는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로 점철되어 있어
알듯 말 듯, 전해질 듯 말 듯 애를 태운다.
그리고 이게 당최 살인사건에 대한 미스터리 영화인지, 사랑에 대한 영화인지
관객들조차 영화의 중반까지도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마치 '모나리자'를 오마주한 것 같은 포스터도 같은 맥락이다.
모나리자를 오마주한 헤어질 결심 포스터
모나리자, 미소를 짓는 건지 무표정인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작품.
실제 모델이 여성인지 아니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였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 작품처럼
이 영화는 멜로인지 미스터리 수사극인지,
둘의 마음이 마침내 정의될지 정의되지 않을지 미묘하게 흘러간다.
필연적인 바다사나이 해준, 아니 박해일.
서래(西来), 해준(海). 결말은 필연적이었다.
서래, 한국의 서쪽(西)인 중국에서 온(来) 여자.* 해준, 을지로가 고향이나 '나는 바다사나이'를 외치던, 바다(海)를 좋아하던 남자.
한국의 서쪽에서 온 서래가, 마.침.내 바다(해준)에 안긴 채로 영원히 서로의 마음에 묻힌 사랑 이야기.
결국 서래가 바닷속에 고요히 수장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말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마침내. 그렇게 사랑했던 해준의 마음에 안길 수 있으므로.
심지어 해준 역의 박해일은 본명까지 박해일(海溢). 박해일의 출연 역시 필연적이었던 걸까.
이 둘과 대비되는 주변 인물들의 이름도 나름의 해석을 해보자면 둘의 관계와 대비되는 부분이 보인다.
기도수, 서래의 첫 번째 한국인 남편으로 서래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으로 서래의 몸에 KDS라는 문신을 새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산에 함께 가지 않는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이다.
도수(到手)**. 중국어로 '손에 넣다', '획득하다'라는 의미다.
서래를 마치 자신의 이니셜이 적힌 지갑과 같은 소유물로 대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도수는 산을 좋아하고, 해준과 서래는 바다를 좋아한다.
유독 우뚝 솟은 기도수가 오른 산은 도수와 서래의 수직적인 관계를 의미하고,
넓게 펼쳐진 바다는 형사와 피의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수평적인 해준과 서래의 심리적 관계를 의미한다.
해준이 이포에 와서 행복하다더니, 이게 행복한 표정인가요 정안?
이와 비슷하게 대비되는 인물이 정안, 해준의 부인이다.
멀리 떨어져 살아도 일주일에 한 번씩 본인의 집에 와 의무적으로 부부의 관계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안.
결국 그녀는 영화 내내 시종일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종국에는 해준과 별거를 선택하며 떠난다.
정안(定案). '결정된, 완결된 안건', '최종 결정'을 의미한다.
헤어질 결심조차 내리지 못하는 해준과 서래의 관계('결심'이란 뜻 자체가 아직 확정되고 종결된 것이 아닌 상태)와 대비되어, 정안은 마치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듯 해준 보란 듯이 집을 나간다.
손에 들린 자라와 석류는 정안과 이주임의 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섹슈얼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여성 건강의 상징 석류와 남성 건강(정력)의 상징인 자라.
이주임이 여성 동료인 줄로만 알았던 관객들에게 남성 이주임의 존재는 반전으로 다가온다.
주말부부 대부분이 이혼을 한다더라,라고 얄밉게 얘기한 이주임에게
섹스리스 부부 절반이 이혼을 한다고 받아친 정안.
여자 동료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회사의 남성 동료의 '섹스리스' 상황까지 알고 화두에 올릴 정도라면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섹슈얼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불륜의 상황이었던 해준과 서래가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키스를 한 것과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 헤어져요, 마침내.
138 숫자의 의미, 우리 마침내 헤어져요(要散吧!)
서래가 남편 기도수를 죽이기 위해 올랐던 산 138층,
영화의 러닝타임 138분.
왜 138이었을까?
중국어는 발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고백데이인 520은 발음이 wu er ling(우얼링)인데, 사랑한다는 wo ai ni(워아이니)와 발음적으로 비슷하여 고백데이가 되었다.
138, 중국어로 읽으면 yao san ba이다. (1은 yi로 읽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yao로 읽는다)
yao san ba는 要散吧의 병음이기도 한데,
要는 '~해야 한다', '~할 것이다' 등의 결심, 의지 등을 나타낸다.
散은 흩어지다의 의미, 吧는 '~하자!'라는 느낌을 주는 어기이다.
결국 138이란 숫자로 감독이 나타내고 싶어 했던 것은 '우리 헤어져요'라는 의미일 것이다.
138층을 오르고 나서야 남편과의 관계를 끝낼 수 있었던 서래,
월요일 할머니 핸드폰에 적힌 138층의 의미를 알게 된 뒤에 서래를 떠날 수밖에 없던 해준,
138분의 러닝타임이 지나고 나서야 결국엔 물리적으로 헤어질 수 있었던 해준과 서래,
그리고 영화관을 떠나야 하는 우리 관객들까지도.
박찬욱 감독은 138이란 숫자로 '헤어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게 중국식이라고요? 딤섬을 주세요.
点心(dian xin)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의미의 중국어 단어인 딤섬을 좋아한다.
둘이 먹는 중국음식이 중국식 볶음밥이 아니라 딤섬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익지 않은 날것의 초밥에서 마음에 점을 찍는 딤섬으로 음식이 바뀌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긴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영화였다. 내용뿐만 아니라, 박찬욱 감독의 연출이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같은 형태를 두고 자연스레 전환되는 것이나(시체 눈-박해일 눈-사천왕 눈), 줌인, 줌아웃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쓰인다거나 음악과 소리를 쓰는 방식 등이 마치 그 옛날 히치콕 영화를 봤을 때처럼 기묘하고 스타일리시해 소름 돋았다.
이 작품이 OTT에 나온다면 미장센에 대한 리뷰 글이 많이 올라오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역시 화룡정점은 영화 보자마자 읽은 이동진의 한줄평.
'파란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 옷처럼, 미결과 영원 사이에서 사무치도록.'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리, 한줄평을 읽자마자 이미 영화가 그리워졌음을.
当你说我爱你的瞬间,(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你的爱就结束了,(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当你的爱结束的瞬间,(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我的爱就开始了。(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서래, 해준의 마음에서 영원히 영면하여라.
[2차 관람 후 부연 설명]
*서래 이름의 철자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았으나, 서래가 2차 사건 후 해준이 찾아올 때 혼잣말로 본인의 이름을 중국어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발음이 西의 xi보다는, xia로 들리는 것을 보아 여름 서(夏) 등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나무 위키에 의하면, 탕웨이의 제안으로 西来에서 瑞(상서로울 서)来라고 변경했다는데, 그러면 발음이 rui lai가 된다. 분명 ㅅ발음으로 들렸는데, 이는 3차 관람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겠다.
**기도수 이름의 철자가 초반 지갑 내 주민등록증에 나오는데, 내가 추측한 到手가 아닌 都秀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가 의미 부여한 부분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글은 수정하지 않고 이대로 두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