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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Sep 05. 2022

<신의 물방울>에 나온 와인 마셔보기 - 2

샤스 스플린, 뿌삐유, 피오 체사레 바르바레스코, 피오 체사레 바롤로


<신의 물방울>을 처음 읽었던 것은 2017년. 이 시리즈의 1탄을 썼던 때는 2020년.

그리고 2022년, 다시 <신의 물방울>을 보는 지금. 이 시리즈의 2탄을 쓰고 있다.

2017년보다는 2020년이, 2020년 보다는 2022년이. 5년이란 시간이 지난 만큼 이 만화책 속에 아는 와인이나 마셔본 와인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느낄 때 즐겁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티지는 다르더라도 내가 그 와인에 대해 느낀 감상과 아기 타다시가 느낀 감상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 지를 비교해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 기쁜 마음을 갖고 <신의 물방울>에 나온 와인 마셔보기 2탄을 써보고자 한다.




[신의 물방울 7권] 샤또 샤스 스플린

Chateau Chasse-Spleen


신기한 광경이었어요…. 페가수스를 타고 추억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났어요.
거기서는 친구들의 웃음과 따뜻한 손이 날 받아줬어요.
시즈쿠씨, 이건 그냥 술이 아니었어요. 그런 게 아니에요.
보다 심오하고 엄숙하고 풍부하고 그러면서 싱싱한….
생물 같은 존재입니다.

ㅡ 응. 그건 그 슬픔을 보듬어준 와인이야.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 같은 우아함으로 넘치는 와인. 그래서 '샤토 샤스 스플린'이라고 이름 붙인 거야.
'샤스 스플린'의 뜻은… '슬픔이여, 안녕' 이래.
- 7권 85쪽, 다카스키 & 미야비 -




학창 시절, 순수하게 서로를 좋아했던 다카스키와 업무로 재회한 미야비. 첫사랑이 지금도 멋있는 모습이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다카스키는 재수 없게 변했다. 하지만 그가 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 졸부라고 무시당한 마음에 상처를 받아 물질만능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 다카스키에게 시즈쿠가 전한 와인은 바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라뚜르'라고 불리는 샤또 샤스 스플린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라뚜르'라니, 너무 따뜻하지 않은가? 샤스 스플린은 그런 와인이다. 다카스키를 비롯해 상처받은 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와인.


샤스 스플린이 보여주는 심상은 숲 속에 위치한 시골집에 놀러 간 느낌이다. 떡갈나무 숲 사이사이에 굳건하게 자라고 있는 체리 나무. 낙엽이 떨어진 땅에서 가만히 고개를 내민 허브들. 떡갈나무의 낙엽들이 바스락바스락거리는 숲을 걷다가 신기루 같이 마구간 하나를 발견한 느낌. 체리나무의 산미, 낙엽이 잔뜩 쌓인 흙냄새, 떡갈나무 같이 껍질이 두꺼운 나무의 오크향, 그리고 첫 잔에만 느껴진 소똥 냄새. 전체적으로 고급진 맛이었는데, 아쉬웠던 것은 망빈(망한 빈티지)라 불리는 2013 빈티지라 소똥 피니쉬가 금세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망해도 샤스 스플린이라고, 시골집 같은 따뜻한 느낌은 여전했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뜻의 '샤스 스플린'. 힘든 날, 누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줬으면 하는 날, 한 잔 하는 것은 어떨까. 다카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힘들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신의 물방울 9권] 뿌삐유

Poupille


아무튼 향기가 좋아. 진하고, 녹진하면서 검은 과일의 맛이 나.
그것도 흑인의 가슴을 울리는 듯한 소울풀한 곡.
난 말야, 그 와인을 마실 때면 음악은 꼭 재즈를 들을 거야.
- 9권, 카즈오 -



응. 카스티용의 와인 중에서는 아주 단단한 거거든.
마시기 편한 메를로 100퍼센트인 것에 비해 까다롭고 옛스러운 와인이야.
자연 농법에 2천 엔대인 것치고는 보기 드물게
100퍼센트 새 오크통에서 숙성시키지.

ㅡ 블랙 체리, 카시스, 거기에 플럼의 힘차고 진한 향기.
상당히 묵직한 와인이군요.
- 9권 180쪽, 시로 & 시즈쿠 -



시즈쿠가 신입사원일 때 친했던 선배 카즈오는, 시즈쿠에게 소울풀한 재즈 같은 어떤 와인을 같이 마시자고 후일을 기약한다. 하지만 카즈오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카즈오의 형이 카즈오를 대신해 시즈쿠에게 전달한 와인이 바로 뿌삐유이다.


뿌삐유는 2014와 2015 빈티지를 3병 정도 마셨는데, 시로의 설명에서 가장 와닿았던 표현은 '단단하다',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과실 향이 넘쳐흐르고 마시기 쉽다는 메를로 100%로 이루어진 레드 와인인데, 이상하게 마실 때마다 까랑까랑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마셨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허브, 터프한 가죽 향, 덜 익은 불친절한 블랙베리 향, 그리고 사포같이 드라이한 텍스처였다. 그래서 어느샌가 뿌삐유는 맛이 없는 와인이란 선입견이 생겼었다.


그런데 가장 최근 2015 빈티지를 마셨을 때, 오래 열어두어서 그런지 아주 맛있게 먹은 기억이 이전의 선입견을 덮었다. 다크 체리향, 오크향, 멘솔향, 타바코 향이 부드러운 제비추리살과 어우러지면서 입안에서 부드럽게 스며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음에 터프하게 느껴졌던 단단한 과일 씨 같은 느낌이 점점 부드러워진다. 뿌삐유는 처음에는 단단하지만, 시간을 두고 마시다 보면 시즈쿠가 표현한 것처럼 블랙 체리, 카시스, 플럼 등 과일의 풍미가 부드럽게 이끌어 주는 와인이었다. 카즈오의 재즈 같다는 표현은 선뜻 잘 이해가지는 않지만, 각각의 파워풀한 풍미, 개성이 점점 하나로 녹아드는 것이 재즈라면 재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의 물방울 20권] 피오 체사레 바르바레스코 & 피오 체사레 바롤로

Pio Cesare Barbaresco & Pio Cesare Barolo


이 '바르바레스코'는 근사한 와인이고, 레오나르도 씨가 말한 것처럼,
날이 저물기 직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연상시키는,
언제까지나 서성이고 싶어지는 '일렁임'이 있어.

ㅡ 맞아요. 공기에 안겨있는 듯한. 늦여름의 저녁 무렵이 마실 때 마다 떠올라요.
- 20권 49쪽, 시즈쿠 & 미야비 -


이게 붉은빛(카기로히)이에요. 생각났어요. 붉은빛. 즉 '카기로히'는 여름에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 시에서는 동틀녘에 산등성이를 물들이는 타오르는 듯한 이 빛을 말해요.
동쪽 들판에 서광이 비침에, 돌아보니 서쪽 하늘로 달이 기울고 있구나ㅡ.
- 20권 62쪽, 시즈쿠 -




내가 <신의 물방울>을 읽으며 제일 웃음 터진 에피소드. 바로 이탈리아인 레오나르도가 헤어진 여자 친구를 좇아 일본 아스카에 와 그녀가 남긴 시와 닮은 와인을 찾는 에피소드다. 세상 이탈리안인 레오나르도가 "아스카까지 왔거든예~"하며 부산 사투리를 쓰는 매 장면들이 웃음 지뢰. 레오나르도의 여자 친구가 셀러에 남기고 간 와인은 다름 아닌, 이탈리아 피에몬테 와인 명장 피오 체사레 바르바레스코와 바롤로 2001년 빈티지다. 레오나르도는 매일 밤 이 와인을 마시며 해가 지기 전의 달을 바라본다.


바르바레스코와 바롤로 와인은 모두 네비올로 100%로 만든다. 네비올로는 이탈리아의 피노 누아라 불릴 만큼 맑고 붉은 색깔을 자랑한다. 그런 네비올로의 특징이 '늦여름의 저녁', '동틀녘 타오르는 듯한 빛'을 연상시킨다.


피오 체사레 바르바레스코 2014 빈티지를 마셔보았다. 역시 맑고 붉은 컬러. 처음엔 향기로운 플로랄 느낌이 나다가 갈수록 바질, 후추와 같은 허브나 향신료 향, 오크향, 텁텁한 타바코 향이 나고 가끔 피맛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리고 습한 모스 향이 느껴지는데 이런 느낌이 시즈쿠가 이야기한 습한 늦여름의 저녁을 연상케 한다. 계속 스월링을 하다 보면 가끔 모카향이나 무화과 같은 향도 따라온다. 혀가 꺼끌해질 정도로 탄닌감이 매우 있는 편.


피오 체사레 바롤로 2013 빈티지는 바르바레스코와 마찬가지로 맑고 붉은 컬러, 싱싱한 딸기향이 느껴지는 부분이 피노 누아를 연상케 한다. 다만 피니쉬에서 살짝 부드럽게 쪼이는 듯한 탄닌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피노 누아와 달랐다. 확실히 뒤에서 끌어당기는 탄닌감과 붉은 컬러가 달이 기울고 있는 서쪽 하늘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신의 물방울 26권] 아데가 비니콜라 다아루가 아루가 브랑카 브릴란테

Adega Vinicola d'Aruga Aruga Branca Brilhante



이것은… 싱그러운 어린 풀처럼 옅은 향기다…. 하지만 향기 자체에는
티끌 한 점이 없어. 포도 품종은… 샤르도네도 아니고 피노 누아도 아니야.
물론 젝트에 쓰이는 리슬링도 아니야…. 희미한 감귤의 요소는 소비뇽 블랑을
생각나게 하지만, 그 정도로 강하게 주장하는 아로마도 아니야. 이것은 도대체….  

여름이다.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산골짜기의 시냇물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어.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내 눈앞에 한 쌍의 희고 아름다운 철새가 날갯짓하며
내려왔다. 이름도 모르는 새의 미역 감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친구와 함께 조릿대 앞을 뜯어, 조릿대 배를 만들어 시냇물에 띄운다.
물살에 흔들리는 조릿대 배를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서 노스탤지어가
고개를 든다. 아아, 무언가가 들려. 이건 뭐지…? 알겠어. 이것은….
- 26권 144쪽, 시즈쿠 -



예, 영감님은 아시겠죠?
화장기 없는 순수한 코슈 포도의 특색을 그대로 살린 스파클링이에요.
ㅡ과연 기포가 힘차군. 코슈 품종의 스파클링 중에서
이처럼 탄탄한 스파클링 와인은 그리 흔치 않은데.

병에서 2차 발효는 물론이고 20개월이나 숙성을 거쳐 만들어내는
상파뉴에도 밀리지 않는 장기숙성형의 스파클링이에요.
- 26권 152쪽, 시즈쿠 & 로베르 -



이 와인은… 도도하게 흐르는 산골짜기의 시냇물을 방불케 하는 투명감과 힘참. 어딘가 그리우면서, 어딘가 아득함도 있어. 글라스의 바닥에서 퐁퐁 솟아나는,
이 부드럽고 아련한 향기.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아.
엄숙하면서 주제넘게 나서지도 않지.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의,
화려하고 수다스러운 매력과는 또 다른. 섬세하지만 존재감 있는 아로마….
- 26권 154쪽, 로베르 -



섬세한 요리와 곁들여도. 결코 자기를 내세우려 들지 않고,
잠자코 미소 지으며 옆에 앉아 있어 주는. 봐, 들리지 않아, 로베르?
당신 어머니가 좋아하셨다는 코토의 음색.
아주 힘차고 분명하지만, 나서지 않는 악기라고 당신이 늘 말했잖아.
- 26권 166쪽, 엘리제 -




아기 타다시가 애국심을 다해 엄청난 분량을 할애한 일본 코슈 품종의 스파클링 와인 아루가 브랑카 브릴란테. 칸자키 유타카가 사도로 표현한 마돈나를 찾던 시즈쿠는 로베르의 전처이자, 유타카의 마돈나인 엘리제 할머니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부르고뉴에서 와인을 만들다가, 부르고뉴 주류 분위기에 지쳐 샴페인으로 떠나 '어떤' 샴페인을 만들고자 했으나, 끝끝내 만들기를 포기하고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리 로베르가 고급 샴페인을 권해도 목 한번 축이지 않는 엘리제. 로베르는 시즈쿠에게 엘리제가 와인을 마시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때 시즈쿠는 엘리제가 만들고자 했던 와인이 일식과 잘 어울리는 스파클링 와인임을 깨닫고, 엘리제에게 권하는 와인이 바로 일본의 코슈 품종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 아루가 브랑카 브릴란테이다.


작년에 코슈 와인 3종을 연달아 마셔본 적이 있다. 내가 느낀 코슈의 느낌을 시즈쿠와 로베르, 엘리제가 정말 잘 표현했다.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아로마', '결코 자기를 내세우려 들지 않는', '나서지 않는' 등이 코슈의 특징과 정말 잘 맞다. 그중 가장 와닿았던 것은 단연 '화장기 없는 순수한' 이란 묘사다. 일본의 코슈 품종은 정말 일본을 닮았다. 남에게 피해 끼치기 싫어하는 조용함과 정돈됨,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과 담백함. 내가 느끼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코슈 와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본 초밥을 먹을 때 생선의 종류가 달라질 때마다 혀를 정돈하기 위해 먹는 초생강과 녹차 같은 와인이라고나 할까.


아루가 브랑카 브릴란테 2016 빈티지를 마셔보았다. 0.5초 샴페인 같은 이스트가 나타났다가, 아스라이 사라진다. 일본 코슈 특징으로 보이는 매실향과 내추럴 와인에서 맡았던 파마 중화제 향이 떠나간 이스트 향의 자리를 채운다. 기포감은 탄산수 같이 다소 강하고, 산미와 미네랄리티를 헤매다가 미네랄리티에 정착한다.


일단 일본에서 나고 자란 시즈쿠와 로베르에게는 일본 품종인 코슈로 만든 이 와인은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 노스탤지어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기에 두 캐릭터 모두 한없이 일본스러운 심상을 떠올리는 데 어려움이 없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누룩의 이스트 향은 그야말로 아득한 노스탤지어이고, 청주 같은 매실향은 수다스럽지 않게 자기가 있을 곳을 지키는 중용을 보인다. 그리고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기포는 마치 힘차게 흐르는 시냇물과 같다. 때문에 저런 표현이 나온 것이다. 아마 <신의 물방울> 전체를 통틀어서 캐릭터들의 테이스팅 노트가 가장 공감이 갔던 와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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