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내 상상 그 이상으로 잘 맞는 음식과 와인의 조합을 만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나름 다양한 페어링을 많이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페어링 하지 않은 음식이 있단 것을 깨달았다.
바로 '문어'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단체 모임이 있어, 문어요리와 다양한 와인을 페어링 해보기로 했다.
#문어에는 무슨 와인이 어울릴까
출처: 와인 위키 / 문어와 와인 페어링 조합
문어라. 너무 비리진 않을까? 텍스처가 와인이랑 안 어울리지 않을까? 너무 막연해서 이곳저곳 서칭을 하다가, 와인 위키에서 위와 같은 이미지를 찾았다. 구운 문어에는 쇼비뇽 블랑, 문어 샐러드에는 슈냉 블랑, 문어 초밥에는 보졸레, 문어 세비체에는 게뷔르츠트라미너 등등. 하지만 예시로 든 대부분의 요리가 서양식 문어 요리라, 우리가 방문할 옥토스의 문어숙회, 문어 튀김, 문어탕 메뉴와 어울릴지 자신할 수 없었다.
여러 고민 끝에 내가 크게 기준을 잡은 건 이러했다.
1. 문어도 해산물이니 숙회 같은 메뉴에는 미네랄리티가 충분한 화이트를 페어링 할 것.
2. '문어'보다도 튀김, 숙회, 라면 등 요리 자체에 맞출 것.
3. 의외로 스파클링은 문어의 표면 컬러랑 맞춘 로제가 어울리지 않을까?
이런 고민으로 엄선해서 고른 와인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무엇이 무엇이 잘 어울릴까요. 문어 두마리 시선강탈!
Wine list.
1. Roger Goulart Cava Pinot Noir Brut Rose 2017
로저 구라트 까바 피노 누아 브뤼 로제 2017
2. Pagos del Rey Pulpo Albarino 2020
펠릭스 솔리스 폴포 알바리뇨 2020
3. La Spinetta Toscana Vermentino 2021
라 스피네타 토스카나 베르멘티노 2021
4. Octopoda Cabernet Sauvignon 2019
옥토포다 까베르네 쇼비뇽 2019
Roger Goulart Cava Pinot Noir Brut Rose 2017
로저 구라트 까바 피노 누아 엑스트라 브뤼 로제 2017
Sparkling Wine from Cava, Spain
Pairing with 문어숙회
붉고 탱글한 문어에 붉고 골격 있는 피노 누아 로제 까바 페어링
아무래도 첫 시작은 스파클링 와인이어야 하는데, 어떤 스파클링 와인을 매칭해야 할지 가장 고민스러웠다. 늘 그렇듯 샴페인으로 갈 것인지, 스페인 까바로 갈 것인지 고민이 됐으나 과감하게 까바 로제를 선택. 샴페인은 산미나 풍미 자체에 화려한 부분이 있어 독자적으로 더 빛나는 와인들이 많은 반면, 까바는 이 음식, 저 음식 두루두루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문어의 표면이 붉어서, 화이트 스파클링보다는 로제 스파클링이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 골라본 로저 구라트 까바 피노 누아 엑스트라 브뤼 로제.
건딸기, 건포도의 느낌. 세밀한 기포. 확실히 샴페인의 화려한 산미보다는, 까바의 쌉싸름함이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문어 초밥에 보졸레를 추천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문어숙회의 탱글한 바디감과 육질에 피노 누아로 만든 로제 까바를 페어링 하며 바디감을 맞춰본 것인데, 괜찮은 조합이었다. 다만 짭조름한 미네랄리티가 부족한 것은 아쉬웠다.
성수 와인앤모어에서 39,900원에 구매.
Pagos del Rey Pulpo Albarino 2020
펠릭스 솔리스 폴포 알바리뇨 2020
White Wine from Galicia, Spain
Pairing with 문어숙회, 삼을 곁들인 문어 튀김
삼과 야채 덕에 잘 어우러진 폴포 알바리뇨와 문어 튀김
무려 레이블에 문어가 그려진 폴포 알바리뇨. 문어와의 좋은 합은 따놓은 당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어가 그려진 폴포 시리즈에는 총 3가지의 와인이 있다. 남아공 쇼비뇽 블랑,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 그리고 스페인의 알바리뇨다. 그중에서 내가 스페인의 알바리뇨를 고른 이유는 하나. 스페인에는 문어를 식재료로 한 음식이 많기 때문. 와인과 음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와인도 문어와 어울릴 거란 믿음이 있어서 승부를 걸어보았다.
뭔가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과 프랑스 쇼비뇽 블랑의 중간 느낌. 뉴질랜드 쇼비뇽 블랑 보단 덜 활발하면서도, 프랑스 쇼비뇽 블랑 보다는 덜 우아한. 푸릇푸릇한 그라스 향, 화사한 하얀 꽃 향과 복숭아 향. 짭조름한 미네랄리티, 산미가 문어숙회와 어울린다. 문어 튀김과도 페어링을 해보았는데, 단순히 튀김만 나왔다면 약간 오크 터치된 샤도네이가 더 어울렸을 수도 있겠지만, 삼과 야채를 얹어 먹는 문어 튀김이라 폴포 알바리뇨와 나쁘지 않았다.
평촌 와인샵에서 32,900원.
La Spinetta Toscana Vermentino 2021
라 스피네타 토스카나 베르멘티노 2021
White Wine from Toscana, Italia
Pairing with 문어숙회, 고등어 회
해산물 킬러 코뿔소 와인. 고등어 회와 아주 잘 어울린다.
해산물과 잘 어울리기로 정평이 나있는 코뿔소 와인. 사실 샤블리를 골라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추천받은 와인. 어쨌든 문어도 해산물이니, 이 정도로 정평이 나 있는 화이트 와인이라면 믿고 페어링 해보자고 생각해 선택했다. 게다가 이 와인의 떼루아는 바다를 품고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바다의 모래, 해양 퇴적물의 풍부한 땅에서 자란 이 와인의 포도는 바다에서 나고 자란 해산물과 당연하게 잘 어울릴 것이란 생각.
진하게 퍼져 나오는 등유 페트롤 향, 귤향, 달큼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달진 않고, 그런 뉘앙스만 풍긴다. 바다의 모래를 떼루아로 둬서 그런지 풍부한 미네랄리티가 혀에서 기나 긴 여운을 이끈다. 문어숙회보다는더 맛이 강한 고등어회랑 잘 어울렸는데, 석화랑도 잘 어울릴 것 같다.
평촌 와인샵에서 39,900원에 구매,
Octopoda Cabernet Sauvignon 2019
옥토포다 까베르네 쇼비뇽 2019
Red Wine from Oakville, U.S.A
Pairing with 문어 라면
미국의 까베르네 쇼비뇽과 매운 라면의 조합은 옳다.
또 다른 문어 와인. 옥토포다 까베르네 쇼비뇽. 사실 문어와 까베르네 쇼비뇽의 조합은 잘 상상이 안 가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전에 탄닌이 강하지 않은 미국 로버트 몬다비 까베르네 쇼비뇽과 신라면을 페어링 한 적이 있는데, 신라면의 매콤함이 중화되면서 꿀떡꿀떡 넘어갔던 기억이 나, 문어 라면과 페어링을 시도했다.
예상과 달리 달큼했던 옥토포다 까베르네 쇼비뇽.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달아서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오히려 단맵단맵의 느낌으로 매콤한 문어 라면과 찰떡이었다. 병을 뚫고 나오는 딸기와 블루베리 요거트(요플레)향, 살짝 오크한 바닐라 향이 마치 매운 라면 한번 먹고, 달달한 마시는 요거트 한번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만족.
옥토스에서 4만 원 대에 주문.
비록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지 얼마 안 되어 페어링 후기를 적는 것이 죄스럽긴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으로 그린 와인과 안주의 페어링을 실현해 보는 것은 즐겁다.
생각보다 문어는 향취가 센 해산물이 아니라, 예상보다는 더 무난하게 흘러갔던 것 같다. 준비한 화이트 와인들 모두 미네랄리티가 풍부한 터라, 어느 정도 어울릴 거라 생각했고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의외로 기억에 남는 건 오히려 까바 로제와 문어숙회의 조합이었다. 딸기향이 날 텐데 이게 어울릴까? 싶었지만, 적포도인 피노 누아가 문어의 바디감과 골격을 맞춘 부분과 두 음식의 컬러를 맞춘 부분이 흥미롭게도 맞아떨어져서 재밌게 페어링 해보았다. 이렇게 자기만의 조합을 하나하나 찾는 것이 와인 페어링의 묘미 아닐까.
옥토스는 강남 신논현 부근의 문어 요리 전문점으로, 문어숙회, 튀김, 탕이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콜키지는 테이블 당 1병 무료, 2병부터는 3만 원씩 콜키지 비용이 부과된다. 캐치 테이블에서 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