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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Dec 26. 2018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은 사람에게 권하는 순례 여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건너지 마시오. 늘 관계에 있어 지나치게 방어적인 회피 유형의 사람들. ⓒ 오수진
난 두려워.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 또는 무슨 잘못된 말을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냥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382p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춘기 시절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어릴 적 우리 동네는 중학교를 뺑뺑이로 추첨하여 들어갔다. 하필이면 평촌 일대에서 가장 잘 산다는 애들만 가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누가 괴롭힌 건 아니지만 당시 소극적이었던 성격 탓에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적극적으로 괴롭힘 당한 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단짝은 아니었던 묘하게 느꼈던 거부당함이 있었다. 이런 경험은 사춘기 시절 내내 친구들과 관계를 맺을 때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내가 그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다행히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때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였고, 친구들 덕분에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참 다행인 일이다.

두 번째로 머릿속에 떠오른 대상은 내가 만나왔던 회피형의 전 남자 친구들이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만나왔던 남자들은 회피 유형의 사람들이 많았다. 갈등이 생기면 그 일을 같이 해결하기보다는,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거나, 대화를 하지 않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고 더 이상 그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유형의 남자들. 그중에서도 최악은 헤어지자고 얘기도 안 하고 그냥 사라진 사람이었다. 그런 회피형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 있었는데, 모두 다자키 쓰쿠루와 같이 친구나 연인, 혹은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단체로 폭력을 당했거나, 부모님과 안정적인 애정관계를 만들지 못했거나, 혹은 연인이 아무 이유 없이 떠나버렸거나 등등. 그들은 하나같이 그 상처를 제때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 그 상처가 내내 마음에 남아 있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또 다른 관계에서 자신이 버림받을까 봐 늘 거리를 두고 방어적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밝은 성격으로 그들이 달라질 수 있을까 항상 기대를 했고, 그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늘 관계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내가 친구들로 하여금 마음에 안정을 찾았던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뒤 내가 깨달은 것은, 어떤 큰 마음의 상처를 겪은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어야만 그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그 상처를 보듬어 줄 수도 없고, 치유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잘해봐야 일시적인 치유만을 가져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나를 위한 순례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 오수진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는 지울 수는 없어. – 51p

친하게 지냈던 4명의 친구들에게 갑작스레 부정당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던 다자키 쓰쿠루가 사라와 같은 여자 친구를 만난 것은 그러므로, 그가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인 셈이다. 억은 덮을 수 있어도 역사는 지울 수 없다는 말은, 기억에 켜켜이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스스로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역사와 마주하라는 조언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 여행을 바라보는 나 역시 그가 또다시 거부당하지는 않을까 책을 덮을 때까지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 용기 있는 순례 끝에는 한 층 더 성장한 다자키 쓰쿠루가 있었다.


이 책을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고 본인의 마음속에 숨어버린 회피형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마음 같아선 그동안 만났던 회피형 남자 친구들에게 소포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 상처를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미루고 덮어둔다면 그 상처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그 안에 깊숙이 자리 잡아 반드시 스스로를 좀먹을 것이다. 상처를 마주하라는 것이 반드시 쓰쿠루처럼 직접 그 대상을 찾아가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왜 상처를 받았는지, 그로 인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래서 나는 지금 어느 곳에 서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때로는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상처를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나의 경우는 그냥 누군가는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일종의 판타지라고 인정을 해버리니 훨씬 마음이 편해졌었다. 남자에게 차였을 때는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읽다 보면 그 일이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독이는 데에 도움이 됐었다.


'무엇을 만들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쓰쿠루(作)처럼 회피형들이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마주해 쾨쾨한 동굴 속에서 나와 쓰쿠루와 같이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길’ 바란다. 무섭다고 아프다고 피하기만 하지 말고, 자신을 위한 순례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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