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 번째 올빈벙을 가졌다.
이번에는 어떤 올빈 와인을 만날 수 있을지 항상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모임에 참석한다.
지난번 모임에서 내가 '올빈 샴페인'에 대해서 멤버들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내가 가장 처음 올빈 샴페인을 마셔봤던 것은, 제임스 서클링이 내한했던 이벤트에서였다.
당시 샴페인 드 브노쥬 루이 15세 브뤼의 1995, 1996 빈티지를 연이어 시음했었는데,
오래된 샴페인의 보석 호박(앰버) 컬러와 허니, 너티, 그리고 녹진한 호박 같은 풍미,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기포감이 너무도 특별하게 다가왔었다. 젊은 샴페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그 푸근한 느낌.
그날 이후로 앙드레 끌루에의 드림 빈티지 중 오래된 빈티지들을 열심히 맛보며, 올빈 샴페인에 대한 욕구를 누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 올빈벙에 무려 올빈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설레며 모임을 시작하였다.
Wine list.
1. Voirin-Jumel Tradition Brut Champagne Cramant
2. [올빈] Saint-Chamant Cuvée de Chardonnay Brut Champagne 2005
3. [올빈] Poggio Scalette Il Carbonaione Alta Valle della Greve 2000
4. [올빈] Goldeneye Anderson Valley Pinot Noir 2006
5. [올빈] Cascina Adelaide Preda Barolo 2010
6. Finca Flichman Misterio Sweet Chardonnay 2021
보아랑 쥐멜 트라디시옹 브뤼 샴페인
Voirin-Jumel Tradition Brut Champagne Cramant
Sparkling wine from Champagne, France
Chardonnay 50%, Pinot Noir 50%
첫 시작은 아직 젊은 샴페인. 올드 샴페인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영 샴페인을 먼저 맛봐야 하는 법.
요즘 같은 불볕더위에는 샴페인 없이 살 수가 없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자외선과 후덥지근한 더위에 지친 몸에 젊은 샴페인을 먼저 적셔준다. 이날의 식전주는 보아랑 쥐멜 트라디시옹 브뤼 샴페인.
설립자 장 보아랑은 처음에는 와인을 벌크로 생산해서 판매했는데, 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직접 병입 하여 샴페인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장 보아랑의 아들 질 보아랑과 프랑소와즈 쥐멜이 결혼을 함에 따라, 두 가문의 와이너리가 합쳐지게 되었고, 그래서 '보아랑-쥐멜'이라는 샴페인 하우스 이름을 갖게 되었다.
꿀사과, 이스트, 블루베리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 향이 느껴진다. 빵과 사과를 같이 먹고 있는 느낌이랄까. 짭조름한 미네랄리티와 오렌지 껍질 같은 피니시가 더운 여름에 입맛을 돋운다. 아직 잘 살아있는 산미에서 젊은 샴페인을 느낀다. 더운 여름에 천금 같은 샴페인이었다.
생 샤망 뀌베 드 샤르도네 브뤼 샴페인 2005
Saint-Chamant Cuvée de Chardonnay Brut Champagne 2005
Sparkling wine from Champagne, France
Chardonnay 100%
생 샤망 샴페인 하우스는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샴페인 하우스로, 에페르네에 위치해 있다. 주로 샤르도네를 재배하기 때문에 블랑 드 블랑 샴페인에 힘쓰고 있고, 샤르도네 절반 정도 소규모로 피노 뫼니에를 재배하여 로제 샴페인도 생산한다. 한국에는 들어오고 있지 않은 샴페인 하우스.
오랜만에 마셔보는 올드 빈티지 샴페인이라니! 마시기 전부터 전율이 느껴진다. 올드 샴페인에서 잘 느껴지는 풍미들이 있는데, 나에게는 그것들이 아주 진한 노란 호박, 푸욱 익어 갈변된 사과 등으로 다가온다. 생 샤망 뀌베 드 샤르도네 브뤼 샴페인 2005 빈티지도 다르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녹진한 늙은 단호박, 꿀, 푹 익은 사과, 직접 만든 꾸덕한 수제 요거트, 양파 베이글에 치즈 올린 뉘앙스가 향에서 느껴진다. 피니시에 복숭아, 살구 같은 물 많은 과실과 시트러스의 여운이 느껴진다. 시간이 많이 흘러 기포는 아스라이 사라지지만, 여전히 다양한 과일의 풍미를 담고 있어 마치 과일바구니 같은 샴페인이었다. 이 날의 베스트 와인.
포지오 스칼레테 일 까르보나이오네 알타 발레 델라 그레베 2000
Poggio Scalette Il Carbonaione Alta Valle della Greve 2000
Red wine from Alta Valle della Greve, Italy
Sangiovese di Lamole 100%
포지오 스칼레테는 이탈리아 끼안티의 중심부의 알타 발레 델라 그레베에 위치한 와이너리로, 2009년 디캔터가 선정한 TOP 10 와인 메이커로 선정된 비토리오 피오레가 맡은 와이너리다. 이 와인은 그레베 마을의 일 까르보나이오네 빈야드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인데, 재밌는 것은 산지오베제의 조상인 '산지오베제 디 라몰레'라는 포도로 만들었다. 때는 19세기, 필록세라로 인해 유럽의 포도밭이 모두 황폐화되고, 그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10년 만에 산지오베제를 처음 심은 곳이라고. 그러므로 이곳의 포도나무들은 최소 80~90년이 지난 고목인 것.
2000년이면 중학교 입학했 던 때인데, 벌써 그로부터 23년이 지났다. 그런데 향이 이렇게나 아직도 스파이시하다고? 멘솔, 민트 같은 스파이시한 향, 젖은 나무, 장독대 속 잘 익은 고추장, 완숙 토마토에서 켜켜이 쌓인 에이징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나이가 이만큼 들었는데도 엄청난 미네랄리티. 이 와인은 마치 벤자민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지는데, 30분 정도 지나니 스파이시함이 거치면서, 팔각, 블랙커피 뉘앙스가 올라온다. 그러다가 1시간이 지난 뒤 마지막에는 타바코와 버섯 향으로 마무리. 방울토마토가 들어간 바질 크림 리조또랑 굉장히 잘 어울린다.
골든아이 앤더슨 밸리 피노 누아 2006
Goldeneye Anderson Valley Pinot Noir 2006
Red wine from Anderson Valley, U.S.A
Pinot Noir 100%
골든아이 와이너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덕혼, 디코이, 칼레라 등과 한 그룹에 속한 와이너리다. 1996년에 설립되었는데, 사실 그 이전인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댄과 마가렛 덕혼은 시장에서 커져가는 피노 누아에 대한 사랑을 알아차리고 피노 누아에 주목했는데, 1993년에 그들의 첫 번째 피노누아가 덕혼 레이블 아래에서 탄생했다. 그러고 나서 1996년, 앤더슨 밸리에 80 acre의 목장을 구매했으며, 2000년에 드디어 골든아이 이름을 단 그들의 첫 번째 빈티지 피노누아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마신 2006 빈티지는 조금 더 특별한데, 이유는 골든아이 와이너리의 10주년을 기념하는 빈티지 와인이었기 때문이다. 10개의 좋은 배럴에서 탄생한 피노 누아로 엄성한 이 와인에는 '10 degress'라는 이름을 별도로 붙였다(레이블에서 확인 가능).
딸기와 체리에 후추를 뿌린 느낌. 배스킨라빈스의 체리쥬빌레에 애플민트 같은 허브를 올린 뉘앙스. 허브에서 비롯된 스파이시함이 느껴진다. 달큼한 뉘앙스로부터 해가 강하게 쬐는 캘리포니아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배스킨라빈스 슈팅스타 같이 혀에서 톡톡 튀는 텍스처는 오래된 빈티지의 특성 때문일까(마치 신김치처럼). 30분 지나니 단맛이 사라지고 두부 같은 부들부들한 향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관짝 같이 뻣뻣한 오크향으로 마무리된다. 확실히 미국의 피노누아는 부르고뉴 피노누아에 비해 야성적이고 섹시하다.
카시나 애들레이드 프레다 바롤로 2010
Cascina Adelaide Preda Barolo 2010
Red wine from Barolo, Italy
Nebbiolo 100%
카시나 애들레이드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바롤로에 위치한 와이너리로 1817년부터 그 시작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더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2000년대 초반, 아마빌 드로코가 이 와이너리를 구매하면서부터다. 그는 이곳에 모던함을 더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도밭들을 더 확장해 나갔다. 카시나 애들레이드는 주로 네비올로 품종을 다루고 있으며, 그 외 바르베라, 돌체토, 나세타 등도 재배하고 있다.
이 와인의 이름인 프레다는 밭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와인 역시 네비올로 100%로 만들어졌으며, 오크통에서 24개월 동안 숙성, 그 이후 6개월 간 병 안에서 숙성한다.
투명하게 붉은 컬러. 포도나무줄기, 포트와인 같은 아몬드, 느타리버섯 향이 느껴진다. 향은 풍부한 것에 반해, 맛은 깔끔하고 단정하다. 역시 장기숙성이 가능해서 그런지, 2010 빈티지라니 믿을 수가 없는 젊음이 느껴진다. 붉은 육류, 가메요리, 트러플이 가미된 요리와 어울린다고 하는데, 이날 우리는 소시지와 페어링. 충분히 잘 어울리는 페어링이었다.
핀카 플리치만 미스테리오 스위트 샤도네이 2021
Finca Flichman Misterio Sweet Chardonnay 2021
White wine from Barrancas, Argentina
Chardonnay 100%
레드 와인으로 물든 우리의 혀를 씻어줄 화이트 와인 등장. 처음에 어느 국가의 와인인지 밝히지 않고 시음을 했는데 쇼비뇽 블랑 같은 구석이 있지만, 오크한 느낌에서 샤도네이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아르헨티나 샤도네이였다. 이름처럼 미스터리 한 구석이 있는 와인이랄까.
핀카 플리치만은 1910년에 아르헨티나에 설립된 와이너리로, 바란타스와 투푼카토에 빈야드를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로, 100년 이상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볏짚 같은 오크향과 파인애플, 복숭아의 단 향, 꿀과 같은 달큼한 맛이 느껴진다. 오크의 뉘앙스만 없었더라면, 스페인의 쇼비뇽 블랑으로 착각했을 것 같은 와인.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은근 중독되는 느낌. 다음날 아침까지 이 와인의 오크향이 계속 생각나는 매력이 있었다. 수프커리와도 페어링해 보고 싶고, 한국식 탕수육과도 페어링해 보고 싶다.
생각해 보면, 오래된 와인은 오래된 와인만의 '넉넉함', '푸근함'이 있다.
무엇 하나 주장이 강하지 않지만,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여유로움.
얼마 전, 좋아하는 후배와 대화를 하다가 '연차가 올라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회사에서의 나의 궤적은 마치 올드 빈티지 와인 같다고 생각한다. 젊었을 때는 주장이 강했고, 그것을 관철시키고자 유관 부서들과 많이도 투닥거리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그 업무나, 어떤 인간관계에 있어서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고 한다. 한 발짝 떨어져서 관망하는 자세를 배웠다고나 해야 하나. 쓸데없이 에너지를 쓰지 않고, 어디든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크게 주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마디로 여유가 생겼다.
올빈 와인은 그런 와인인 것 같다. 오늘도 와인으로 하여금 인생의 태도를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