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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Oct 24. 2023

올빈 쇼비뇽 블랑에서 여유 있는 나이 듦을 배웁니다.

[올빈 4탄] 보스웰 자클린 퀴베 블랑, 쉐이퍼 까베르네 쇼비뇽 外


지난달, 오랜만에 올빈벙에 다녀왔다.

늘 그렇듯 편견을 깨 주는 와인들이 세병이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피맛나서 칠레 와인을 싫어해!'라고 이야기해 왔고, '너무 공격적으로 까랑까랑해서 쇼비뇽 블랑 별로 안 좋아해!'라고 이야기해 왔던 나였다.

그런데 이번 모임에서 가장 좋았던 와인이 무려 미국 소노마 카운티의 쇼비뇽 블랑 올빈이라니.

무려 1989년 빈티지의 쉐이퍼 까베르네 쇼비뇽보다도 좋았다니.

역시 아직 인생도 더 살아봐야 하고, 와인도 더 많이 다양하게 마셔봐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Wine list.

1. Cakebread Sauvignon Blanc 2015

2. Chateau Boswell Jacquelynn Cuvée Blanc 2011

3. Shafer Cabernet Sauvignon 1989

4. Pangea Ultra Premium Syrah 2013

5. Cantine Povero Cabane Langhe Rosso 2017


네번째 올빈벙 와인들, 가운데의 쉐이퍼 까베르네 쇼비뇽 1989 빈티지가 주인공!






케익브레드 쇼비뇽 블랑 2015

Cakebread Sauvignon Blanc 2015

White wine from Napa Valley, U.S.A

Sauvignon Blanc 94%, Semillon 6%


이번에는 스파클링을 건너뛰고 화이트 와인으로 시작.

케익브레드 셀러는 이마트에서도 판매하고 있는 만큼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화이트 와인 품종에서는 샤도네이를 압도적으로 좋아하는터라, 품종적으로도 역시 기대하는 바가 없었는데,

역시 세상에는 다양한 와인들이 있고, 좋은 때에 마주하면 그간 갖고 있던 편견을 날려 보내게 되는 것 같다.


이 와인은 미국 나파밸리의 화이트 와인인데, '쇼비뇽 블랑'이라고 레이블에 쓰여있지만, 사실은 쇼비뇽 블랑 94%, 세미용 6%가 블렌딩 된 와인이다.

다만, 특정 품종이 75% 이상 쓰이면 레이블에 품종을 표기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 주의 표기법에 따라 레이블에는 '쇼비뇽 블랑'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세계 와인들의 재미있는 점은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와인 역시 그러한데,

일단 발효에 있어서 와인의 80%는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나머지 20%는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발효했다.

쇼비뇽 블랑 품종은 보통 오크보다는 스테인리스 스틸 통을 활용하여 발효하는데, 그 이유는 쇼비뇽 블랑 특유의 '청량한 과실미'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이 와인 역시 그러한 특징을 살리고자 이러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프렌치 오크의 경우에도 같은 이유로 헌 오크 배럴을 사용, 약 5개월간 발효했다. 새 오크 배럴을 사용하면, 오크 향이 와인에 진하게 베기 때문에 한 선택으로 생각된다.


약 20%를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발효한 덕에, 쇼비뇽 블랑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하게 오크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과실 뉘앙스도 잘 살렸는데, 특히 데미소다 같은 사과 주스, 리치 주스와 같이 시원하면서도 달큼한 주이시한 느낌을 잘 살렸다. 전체적으로 리치, 구아바 등 열대 과일 향이 풍부하게 올라온다.

초반까지 이러한 과실 캐릭터가 두드러진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깨를 볶는 듯한 고소한 뉘앙스가 올라온다.


2015 빈티지면 약 7년 정도 되었는데, 장기숙성형 품종이 아닌 쇼비뇽 블랑임을 고려하면 꽤 오랜 시간을 견뎠다고 할 수 있다. 까랑까랑한 양성적 느낌을 갖고 있는 쇼비뇽 블랑도 나이가 드니 유연해지는 모습으로 변하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샤또 보스웰 자클린 퀴베 블랑 2011

Chateau Boswell Jacquelynn Cuvée Blanc 2011

White wine from Sonoma county, U.S.A

Sauvignon Blanc 50%, Semillon 50%


두 번째 와인 역시 미국의 쇼비뇽 블랑이다.

앞의 케익브레드 쇼비뇽 블랑이 쇼비뇽 블랑 94%에 세미용이 6% 블렌딩 된 와인이었다면, 샤또 보스웰 자클린 퀴베 블랑 2010 빈티지는 쇼비뇽 블랑과 세미용이 각각 50%씩 블렌딩 된 와인이다.

어떠한 품종도 75% 이상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블에 '쇼비뇽 블랑'이나 '세미용' 등의 품종을 기재하지 못했고, '퀴베 블랑'이라는 명칭으로 대신했다.


이 와인 역시 그동안 마셔봤던 쇼비뇽 블랑의 뉘앙스와 크게 달라 매우 흥미롭게 마셨다. 오죽하면 이날의 베스트 와인으로 꼽았을 정도다.


화이트 와인에서 쉽게 느낄 수 없었던 솔(음료수 '솔의 눈'과 같은) 향과 짙은 로즈메리 허브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와인에서 이런 느낌의 보태니컬 향을 맡은 것이 처음이라 몹시 신기했다. 그 향 덕분에 허브를 넣은 토마토소스의 페퍼로니 피자가 계속 먹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주 신기했던 경험.






쉐이퍼 까베르네 쇼비뇽 1989

Shafer Cabernet Sauvignon 1989

Red wine from Napa Valley, U.S.A

Cabernet Sauvignon 100%


와우. 쉐이퍼 까베르네 쇼비뇽의 1989년 빈티지를 마시게 될 줄이야. 거의 동년배 수준.

오래되어 코르크에 '와인의 보석'과 같은 주석산이 맺혀있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쉐이퍼 와이너리에 있어, 까베르네 쇼비뇽은 거의 근본이라고 할 만한데, 그 이유는 창립자인 존 쉐이퍼가 1972년에 나파밸리의 포도밭을 구매하고 가장 처음 심은 포도나무가 바로 까베르네 쇼비뇽이기 때문이다.


짙은 검붉은 컬러. 테두리가 살짝 가넷으로 물든다.

올빈 레드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추장 뉘앙스는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은은해서 깜짝 놀랐다.

마치 뭐랄까, 오프숄더를 입은 고추장이라고 해야 할지.

쉬라즈 같은 스파이시한 느낌과 참나무 오크 뉘앙스도 느껴진다.

기본적으로 '고추장' 뉘앙스를 피해 갈 수는 없었는데, 조리기 전의 국물 떡볶이의 국물 느낌이라 묵직하지 않고 라이트 한 느낌든다. 그런 만큼 오래된 빈티지라 그런지 혀에 남는 여운은 조금 덜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포트 와인 같은 견과류 향과 스모키 한 뉘앙스가 발현된다. 이렇게나 오래된 와인인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도 여전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팡지아 울트라 프리미엄 시라 2013

Pangea Ultra Premium Syrah 2013

Red wine from Colchagua Valley, Chile

Syrah 100%


나는 칠레 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칠레 레드와인 특유의 쇠맛, 피맛 때문이고, 화이트와인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올리고당, 물엿 같은 뉘앙스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가끔씩 이렇게 우연찮게 칠레 와인에 대한 편견을 깨 주는 와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즐겁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팡지아 시라 2013 빈티지 역시 그런 와인이었다.


'팡지아'는 그리스어로 '지구 전체'를 의미하는데, 아주 태곳적 모든 대륙이 하나였던 때를 가리킨다. 이 와인에 팡지아라는 이름을 붙인 다름이 아니라, 펜폴즈의 와인 메이커였던 John Duval을 영입함으로써, 이곳 비냐 벤티스꾸에로의 와인 메이커인 Felipe Tosso와 경험, 철학, 크리에이티비티가 하나로 합쳐져 이처럼 훌륭한 와인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를 담았다. 조금 거창하긴 해도, 이들의 지리적 세계관을 담기에 적합한 이름인 듯하다. 애초에 와이너리의 이름인 '벤티스꾸에로' 역시 스페인어로 '눈보라가 치는 높은 곳'이란 의미로, 칠레 파타고니아의 빙하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현한 것이므로, 이들의 지리적 세계관은 알아줄 만하다.


칠레 콜차구아 밸리의 시라 100%로 만들어진 이 와인은 주 짙은 블랙 컬러의 블랙베리와 함께 시라 특유의 스파이시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호주 쉬라즈에서 느꼈던 두유 같은 느낌이 언뜻언뜻 스친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다 마시고 나서 잎차를 빼지 않아 한참을 우린, 얼그레이 홍차 느낌이 가득하다.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구석이 있는 칠레의 시라였다. 우려했던 쇠맛은 전혀 없었다. 칠레 와인이 이렇게나 향긋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이것도 혹시 올빈의 힘일까.






칸띠포베로 카바네 랑게 로쏘 2017

Cantine Povero Cabane Langhe Rosso 2017

Red wine from Piemonte, Italy

Nebbiolo, Barbera, Cabernet Sauvignon


요즘 남편이 가장 꽂힌 품종은 바로 네비올로. 그래서 마무리 주자 역시 네비올로 블렌딩 와인이었다. 깐띠네 포베로 카바네 랑게 로쏘 2017 빈티지는 네비올로를 주축으로 바르베라와 까베르네 쇼비뇽이 블렌딩 된 레드와인이다. 포도 본연의 풍미를 살리려고 했는지, 오크 배럴을 활용하지 않고 스테인리스 스틸 통을 활용하여 발효했다.


장독대 속 푹 익은 고추장 에서 올빈임을 직감한다. 2017 빈티지로 아직 6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짙은 고추장 향이 올라온다. 네비올로에서 오는 나무줄기 향, 그리고 까베르네 쇼비뇽에서 오는 듯한 멘솔 도 함께 느껴진다. 과실 캐릭터에서는 산딸기보단 무겁고 라즈베리 보단 붉은 계열의 베리 향, 아마도 오디와 같은 베리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리고 블랙 올리브향까지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라벤더와 같은 보랏빛 꽃 향과 함께 스모크 라즈베리 뉘앙스가 향긋하게 올라온다. 개인적으로 이 순간이 가장 좋았다. 그러므로 조금 시간을 두고 마실 것





매번 올빈벙 모임을 할 때마다 그동안 몰랐던 와인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고 간다. 그동안은 올빈 레드와인의 푹 익은 매력에 빠져있었다면, 지난번 모임에서는 오래되어 기포가 나풀나풀한 샴페인의 매력에 빠졌었고, 이번에는 올빈 쇼비뇽 블랑에서 의외성이라는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까랑까랑하다고만 생각했던 쇼비뇽 블랑이 나이를 먹음으로써 한층 더 여유롭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매번 올빈 와인을 통해 내 삶을 반추해 보게 되는데, 어렸을 때는 참 날카롭고 직선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호불호가 분명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조금이라도 여유는 있다. 하나하나에 화내고 신경 쓸 만큼 체력이 없어진 탓이기도 하겠지. 그런데 이게 나이 듦, 성숙의 매력이 아닐까. 와인과 함께 나도 무르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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