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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Sep 12. 2023

브랜딩: '이것까지 해야 하나?'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

마스지(MSG) 활동 - 03 위스키바 <갤러리 피그먼트> 방문


"이것까지 해야 하나?"와의 끝없는 싸움


브랜딩이란 무엇일까.

어렵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렵게 생각하기 쉽지만,

단순하게 정의해 보자면,

하나의 컨셉, 본질을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단순하게' 정의해 보겠다고 했지만,

쉬워 보이는 단어와 문장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언가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것은 꽤나 많은 힘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끝까지 밀고 나갈만한 괜찮은 컨셉이 필요하겠고,

주변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그것이 괜찮다는 자기 스스로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일관되어야 한다,라는 기준도 없기 때문에(가능한 모든 것이 일관되어야 하므로) 끝을 모르는 긴긴 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은 힘이 필요하다.


나는 2011년, 브랜드 마케팅 부문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브랜드에 대한 경험도 충분하지 않고, 인사이트도 부족한 나란 사람을 마케터로 뽑아준 것이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때의 나는 마케팅의 '마'도 모르고, 브랜딩의 '브'도 몰랐다. 그런데 마침 선배 한분이 급작스레 퇴사를 하셔서 갑작스레 혼자서 제품을 기획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루는 제품 패키지를 고민하다가, 선배에게 질문을 했다. 나의 질문은 매우 단순했다. 제품의 패키지에 어떤 문안, 워딩들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었다.

제품에 대한 법규, 브랜드만의 양식 정해져 있는 답안이 이미 있을 것 같아서 한 질문이었다.

(감히 고백하건대, 가능한 한 빠르게, 정해진 대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선배의 대답은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정해져 있는 답안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식사 후 중성지방 케어를 통해 대사증후군을 관리하는 컨셉의 제품이니 이 옆에 이런 이모티콘과 함께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이런 것이 더 구체화되었으면 좋겠다는 대답이었다.

이전 제품들엔 적용이 되어있지 않은 것들이라 나에겐 또 하나의 과제로만 느껴졌다.

'어차피 포장은 뜯고 버릴 텐데,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고?'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13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여러 후배들을 받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때 그 선배가 나에게 알려주신 게 바로 '브랜딩'이었단 것을 알게 되었다. 선배는 '브랜딩'이라는 거창한 워딩 없이 그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어리석고 경험이 없던 나는 못 알아차렸지만.


브랜딩은 그런 것이다.

'이런 것에까지 컨셉을 녹여야 한다고?'에 대한 답변.

'누가 이것까지 보겠어?'에 대한 자기 확신.

결국은

'누가 안 봐줘도 괜찮아. 내가 알아보니까'로 이어지는 과정과 결과들. 그것이 바로 브랜딩이다.






서론이 길었다.

최근에 지인이 오픈한 위스키 바를 다녀왔는데, 그들이 구현해 놓은 컨셉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엄청난 브랜딩이 된 것에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마케팅 모임의 멤버들을 데리고 다녀왔다.


회현역에 위치한 <갤러리 피그먼트>라는 바인데,

업장 이름부터 메뉴, 위치, 공간 구성, 소품 하나하나까지도 기가 막히게 하나의 컨셉으로 유기적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먼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곳은 '갤러리'를 컨셉으로 하고 있는 바이다. 고객인 우리는 그 컨셉을 바의 입구에서부터 철저히 경험하게 된다.

이곳이 바인지, 갤러리인지 잠시 잠깐 헷갈릴 정도로

흰 벽에 무심하게 걸려있는 잭슨 폴록 그림 세 점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속에서 음악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셋 중 하나는 필히 문일 것인데, 얄궂게도 문으로 보이는 것은 없고 그림 세 점만이 나를 맞이하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메뉴 구성도 정말 혀가 내둘러진다.

이곳의 시그니처 칵테일들은 시즌마다 메뉴가 바뀌는데,

일관적 이게도 예술가와 작품들을 테마로 한다.

지난 시즌에는 잭슨 폴록과 구스타브 클림트를 주제로 시그니처 칵테일을 선보였다면, 이번 시즌에는 잭슨 폴록 시즌 2와 살바도르 달리, 끌로드 모네가 주인공이 되었다.

잭슨폴록 칵테일 시즌1, 시즌2


잭슨 폴록 작품의 포인트는 불확실성, 불규칙함일 것이다.

과 선이 불규칙하게 만나 하나의 작품으로 녹아드는 것이 바로 잭슨 폴록의 매력인데, 이곳의 시그니처 칵테일에서도 이점을 충분히 살렸다.

잭슨 폴록 시즌 1에서는 직선의 요소가 있는 딜과 커다란 원형의 라임과 레몬, 작은 원형의 핑크 후추가 그러한 느낌을 주었다면, 시즌 2에서는 촉각적인 부분도 살려냈다.

일단 채썰린 라임과 레몬의 껍질에서 직선적인 요소를, 동그란 젤리에서 원형의 요소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지난 시즌과 비슷해 보이는데, 플러스알파는 그 젤리에 있다.

젤리를 씹을 때 통! 하고 터지는 그 느낌이 마치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리는 쾌감과 연결되는 것이다.



갤러리 피그먼트 끌로드 모네, 살바도르 달리


끌로드 모네는 인상파 화가로서 그때그때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런 요소를 허브를 올림으로써 표현을 했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파 화가로, 시계가 흘러내리는 듯한 '기억의 지속'이란 작품이 유명하다. 이를 형상화시키려는 듯, 칵테일의 벽면에 쭉 시럽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공간 구성과 오너먼트 활용 역시 (당연하게도) '갤러리'라는 컨셉에 충실했다.

곳곳에 놓인 예술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갤러리 바에 온 것직감하게 된다. 또한 시즌 칵테일에 맞추어 오너먼트까지 달라지니, 마치 백화점 매장이 시즌에 맞추어 옷을 갈아입듯이 컨셉에 충실하게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당 업장의 QR코드를 인쇄해 둔 POP 역시 캔버스 같이 구현을 해두었고,

팔레트를 형상화한 갤러리 피그먼트의 로고 역시 브랜딩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혀가 내둘러졌던 것은 바로 메뉴판이었다.

'이것까지 컨셉으로 풀어냈다고?'라고 혀를 내두르게 만든 메뉴판.

'갤러리 피그먼트'라는 컨셉에 충실하기 위해 메뉴판을 아트지에 인쇄했다.

솔직히 메뉴판 여기에 인쇄 안 해도 되는 거 모두가 아는데,

일반 종이에 인쇄해도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까지' 구현한,

뚝심의 브랜딩이라 할 수 있겠다.




회현역은 은근히 갤러리 상권?


여기에 덧붙여 나는 회현역이라는 상권에 위치한 것부터가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회현역에는 '피크닉'이라는 유명한 갤러리가 있기 때문이다.

피크닉에 오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전시와 예술 등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늦은 저녁 전시를 다 보고 나서 한 잔을 하고 싶다면,

그들이 '갤러리 피그먼트'라는 이름을 가진 바에 관심을 갖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주인장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손님으로 오는 내 입장에서는 회현역이 마치 하나의 큰 갤러리 상권, 아트 우주로 인식이 되었다.

브랜딩이 잘 되면, 이런 것에조차 의미 부여하는 나 같은 팬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브랜드 마케터로 일한다는 것은 지리지리 하게 이어지는 나와의 싸움이다.

이것까지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당장 제품 출시나 캠페인 데드라인이 코앞에 닥쳐 눈을 감고 싶은 수많은 상황들이 퀘스트처럼 이어진다.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할까 말까 고민도 안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정된 자원(시간, 나의 리소스) 안에서 어떻게든 일관된 컨셉으로 하나의 소우주를 만들기 위해 밀어붙이는 수밖에.

"이것까지 해야 할까?"에 그 누구도 그래라, 말아라 대답해 주지 않는다. 결국 마케터 본인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것'까지 했다고 조직이 더 나를 잘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이것까지 했구나, 너 연봉 더 올려줄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힘든 지리지리 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누군가가 내가 일부러 살린 엣지 하나 알아봐 준다면,

그게 그렇게나 행복한 것이다.

그 맛에 하는 것이다, 브랜드 마케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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