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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Jan 13. 2020

혼자여도 괜찮은 당신, 겁 없이 사랑하세요

이병률의 <혼자가 혼자에게>, 드라마 <또 오해영>이 전하는 가르침

피흘리는채 누워있는 박도경 / tvN <또 오해영>


세상과의 이별을 앞둔 순간에 단어 하나가 맴돌더라도 그 단어를 마음속에서 꺼내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죽음 앞에서 확연히 떠오르는 뭔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하거나 다 풀고 갈 상황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살면서 미처 다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어리석게도 영원히 내성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 103p



한 남자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 그의 머리 주변에는 피가 흐르고, 얼굴 위에는 눈꽃이 휘날린다. 죽어가는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녀를 처음 본 거리, 그녀와 처음 마주친 카페, 그리고 그녀에 대한 무수한 기억들. 그는 죽어가는 내내 그녀를 그리워하며 후회한다. 더 표현해 볼 걸, 더 마음껏 사랑해 볼 걸.

보통의 사람에게는 죽어가는 마당에 두 번의 기회 따위는 쉽게 오지 않는다. 삶은 공평하게도 모두에게 단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고민하고 재고 따지며 어리석게 보낸다. 마치 자신이 보는 영상이 죽는 순간 본인이 후회하는 장면임을 알기 전의 그 남자처럼, '영원히 내성적'이라는 이병률 시인의 표현처럼.





누군가의 전화기를 들어 그 사람의 많은 것들, 예를 들어 사진이나 문자들이나 저장된 것들을 봤는데, 기분이 휘어졌다면 아마도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 심장 안쪽, 그 너머를 알고 싶고 사람의 깊은 속 마음 몇 평을 들여다보고 싶은 건 다, 그 사람을 차지하고 싶은 허기 때문이다. - 185p



한 여자가 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결혼 예식 하루 전 날, 밥 먹는 게 꼴 보기 싫어졌다는 말로 이별당한 한 여자. 그날로 그녀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똑같은 피투성이의 옆집 남자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그녀의 피투성이 가슴은 온통 휘었다. 어느 날은 그의 무심한 듯 챙겨주는 배려에 기분이 위로 휘었고, 다른 날은 그의 뾰족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아래로 휘었다. 그러하여 그녀는 매일, 매 시간, 매 초마다 위로 아래로 멀미날 정도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녀는 멀미가 나도 자존심도 없이 사랑했다.


어색하게 앉아 자기 얘길 하는 박도경과 오해영 / tvN <또 오해영>


어렸을 때의 수업 시간, 뒤쪽에서 전달받은 쪽지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을 보고 가슴 뛴 적이 있었을 때, 그게 다른 아이에게 전달됐어야 했는데 나에게 잘못 전달되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세상에서 나만 제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해서였겠다. - 185p



그 여자는 남다른 학창 시절 추억이 있었다. 하필 이름이 같은 학우가 같은 반에 있었으며, 그녀 자신과는 다르게 그 친구는 이성친구에게든 동성친구에게든 인기 만점이었다. 그녀는 곧잘 조롱당했고, 놀림받았고, 또 남들에게 자주 헷갈림을 당해 잘못한 것 없이 구박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랬던 그녀가 겨우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었을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헤어졌고 그녀는 지구가 그녀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후 사라지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아버지의 말과 반대로, 모든 것에 힘을 주고 살았다. 그랬던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자는 있었지만, 그녀는 결혼식 당일날 한마디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우주가 그를 추방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태생이 낙천적이고 정이 많은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렬히 옆집 남자를 사랑했고, 속없다는 소리 들으면서도 표현했다. 피투성이가 된 가슴으로, 세상 불행하기로 작정한 그 남자를 품에 안으려 했다. 그 남자는 자꾸만 자신을 풀어헤치려는 그녀가 처음에는 겁이 났지만, 점점 그녀를 믿고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영상이 죽기 전 후회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가 끄는 대로, 그리고 그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사랑해 보자고 생각했다. '나만 아팠으면 억울할 뻔했다'라는 차가운 말로 돌아서기보다는 '널 안고 뒹굴고 싶은 거 참느라고 병이 났다'라는 솔직한 말로 돌아섰고, '야 그래 미안하다, 됐냐?'라는 말 대신 '구두 바꿔 신어, 발 불편한 소리나'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가 보았던 영상들과 현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와 정말 마음껏 열렬히 끝까지 사랑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서로 마음껏 사랑하기로 다짐한 그들 / tvN <또 오해영>


마음이 얼마나 건강한지, 마음이 얼마나 풍부한지는 사랑을 해본 사람만 확인 가능하다. 사랑을 겪은 사람이, 그리하여 사랑에 질문을 해본 사람이 마음을 사용할 줄 알 것이며, 마음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단단하고 유연해진 마음 위로 내려 쌓이는 잡다한 원인들을 흡수하거나 증발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 235p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사랑에 힘들었던 시간을 고스란히 겪고 트라우마를 극복하여 혼자여도 괜찮을 만큼 성장했다. 더 이상 과거의 연인에게, 과거의 기억에 휘둘리지 않고, 그 과거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 마음껏 사랑해보고자 하는 의지, 마음이 다쳤어도 또 한 번 사랑해 보려는 기적 같은 마음. 그것들은 그들이 성장했다는 증표이자, 함께 걸어온 발자국이었다. 그들은 이제 정말 괜찮았다. 그들 자신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사랑해본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을 써본 사람이 또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이제 괜찮다. 사랑해봤고 또 마음을 짜게 쓰지 않는 법을 알았으니까.

혼자여서 괜찮을 때, 그 혼자와 혼자가 만나 둘이 될 수 있다. 혼자로서 괜찮지 않다면, 누군가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거나, 누군가에 지나치게 의지해 나를 잃는다. 그러면 둘이 되지 않고, 늘 관계의 반푼이가 되거나 혼자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그 여자와 그 남자는 행복했다. 혼자가 혼자에게 위로가 되고 사랑이 되었기 때문에.


<혼자가 혼자에게>는 이병률 시인이 전하는 따뜻한 대화이며, 마음껏 사랑하고 또 살아가라는 <또 오해영>의 또 다른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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