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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Jan 26. 2020

제도권이란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린 소중한 아이들에게

1906년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와 2020년 한국의 평행세계

성적이 오르는 친구의 렌즈통에 락스 물을 넣은 적이 있는 명문대 경영학과 학생,
수능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본인 집에서 투신자살한 학생들,
수학 7등급 받으면 용접을 배워 호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인터넷 강의 수학 강사.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4년이 지났다. 나에겐 색다른 동아리 활동을 통해 '덕질'이란 새로운 취미를 개발해 준 곳이자, 공부가 괴롭긴 했지만 학원 가기 전 닭꼬치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난 즐거웠던 곳으로 기억되는 고등학교가 요즘 아이들에겐 아닌 모양이다.


내가 졸업한 후에 입시정책 변경으로 인해, 몹시도 건전했던 '학교 홈페이지 제작 동아리'였던 우리 동아리는 폐지되었고, 우리 때엔 있는지 없는지조차 중요치 않았던 생활기록부가 아이들의 벌점 쌓기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의도'는' 이해를 한다. 입시가 중요하니 동아리도 입시에 도움될만한 것들로 재편성했어야만 했을 것이고, 공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니 평소 생활도 면밀히 반영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가 옳다고 하여 그 방법도 옳다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다. 그 의도에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들이 행하려 했던 건 '교육'이 아니라 '통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제도권이 정해둔 일류대학, 일류 인간이 되기 위한 비인간적 통제.


그 의도 기저에 우리가 더 우선적으로 생각했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눈치 못 챈 척하는 것일까. 하나하나 꼬투리 잡으며 기록할 시간에, 왜 대학을 그렇게나 가려고 하는 건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했겠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직업에 귀천 없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사회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몸을 쓰는 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나 대우가 사무직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월급은 더 높아 애초에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을 학생들은 일찌감치 기술직에 몸을 담는다. 사회적 대우가 다르지 않으니 본인들도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꼭 대학에 가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도 없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이번에 학생을 가르친다는 인터넷 강의 선생이라는 사람이 용접공 비하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 사실 그녀만을 욕할 건 아니다. 우리 대 때만 하더라도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라는 표어가 교실에 심심치 않게 붙었고, 그 표어가 잘못된 것이란 인지도 거의 되지 않은 채 시시껄렁한 농담인 양 웃고 지나갔다. 그런 우리 세대가 자라 누군갈 가르치고 키워야 하는 지위와 위치가 되었으니, 어떤 생각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을지 놀랍지도 않다. 어른들이 이러한데, 아이들이 모든 직업이 소중하고, 꼭 대학을 가지 않아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리가 만무하다.


용접공 비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주예지 강사 / <매일경제> 기사 내 이미지

한스는 남보다 앞서고 싶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50p


지금의 독일은 대학 입시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19세기의 독일은 현재 우리나라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 마치 지금 쓰인 것처럼 낯설지가 않다. 주인공 한스는 동네에서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모두가 졸업 후 대장간에 취직해 일할 때 한스만이 사람들의 모든 기대를 받으며 주 시험에 2등으로 붙어 신학교에 입학한다. 한스는 왜 자신이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 없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한다. 때때로 대장간에서 일하게 될 남들이 자기 발 밑에 있다는 우쭐함을 느끼기도 한다. 모든 동네의 어른들은 한스에게 공부를 주입했다. 입학 전 방학 동안에도 교장, 목사, 수학선생과 함께 예습을 하는 터에 한스는 쉴 때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그렇게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는 처음에는 곧잘 따라가지만,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천재 하일러를 만나고 나서 우정에 대한 기쁨을 마주하게 되고, 그 뒤로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된다. 모범생이었던 한스의 성적이 점점 떨어지자 신학교의 선생들은 하일러와 멀리할 것을 강요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비난과 조롱의 눈빛을 서슴지 않는다. 한스는 내내 앓고 있던 두통이 심해지고 급기야 신경쇠약에 걸려 신학교를  휴학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 돌아가서도 어른들의 냉대는 이어진다. 총명한 학생이었던 한스에게 아낌없이 투자했던 목사나 교장은 고향에 돌아온 한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한스는 아버지의 권유로 자신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대장간에 취직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 사고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게 강물에 빠져 생을 마감한다. 슬프게도 한스의 죽음에 '모두가 이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소홀했다' 하며 깊은 공감을 표하는 어른은 플라이크 아저씨 한 사람뿐이다. 다른 어른들은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도통 이해가 안가 안타까워할 뿐이다.


자해하는 학생과 그녀의 담당 선생인 이수임 / SKY캐슬
자신의 손에 쥐어진 시험지를 들고 갈등하는 한서진 / SKY캐슬
알 수가 없구나. 뭔가 문제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말이야.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니? 그래야지, 기운이 빠져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고 말 거야.
-112p


1906년의 독일과 2020년도의 한국, 정말 놀랍도록 닮지 않았나 싶다. 자신보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에 대한 마음속 깊은 조롱,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대접해주는 어른들(선생, 동네 사람들), 수많은 수험생이 자살하고 있지만 깊게 공감해 주지 않고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사회 등등. 오히려 최근의 현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대학만 가면 된다는 사상 아래 최순실-정유라, 숙명여고 쌍둥이, 조국 딸 입시 비리 의혹 등 부정부패와 결부되어 더 심각하고 복잡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해를 가해도 죄책감도 못 느끼는 소시오패스형 아이들과 이런 억압된 분위기를 못 견뎌 자살하는 아이들이 많아질 수밖에.


올해 초 김난도 교수님의 <트렌드 2020> 강의를 들었는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대학 문과 강의 시험 문제도 서술형이 점차 없어지고 있다는 것. 각종 부정부패로 인해 상처 받은 아이들은 교수의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서술형 문제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 아이들을 탓할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토시 하나하나까지 평가받고, 재단당하고, 그 마저도 어른들에 의해 오염당한 제도 아래에서 부당 대우받은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공정함이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나는 이제 입시 정책이 바뀔 때마다 무서운 마음이 크다. 또 어떤 '의도' 아래 어떻게 이상해졌을까라는 걱정과 요즘 아이들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땅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천편일률적 꿈, 직업에 따른 당연한 귀천, 억압하고 통제하는 교육제도 아래 아이들은 매년 수레바퀴 아래에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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