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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Jul 22. 2020

비 (부제: 내가 비라면 헷갈리겠다)

갑자기 비가 내리는 수요일 오전. 좋기도, 싫기도.


밖에 있을 때는 정말 매우 심각하게 안 왔으면 좋겠지만,

안에 있을 때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멀리 여행 갔을 때 비가 오면, 날씨 요정이 안 따라줘서 라며 탓하지만,

약속 없는 일요일 오전 비가 오면, 가만히 창가에 앉아 빗소리 좋다며 음유하게 되는 것.


연애할 때는 비 안 오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지만,

헤어지고 나면 한 번은 후련히 와줬으면 좋겠는 것.


내가 비라면 헷갈리겠다.

내려가야 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렸을 때는 비가 그다지 좋진 않았던 것 같다. 우산을 쓰고 등교하는 것도 번거로웠고, 걷다가 다리에 구정물이 튀는 게 특히 싫었다. 길을 걷고 있을 때, 혹시라도 큰 자동차가 물 웅덩이를 대차게 밟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깨끗했던 하복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었던 건, 갑작스레 내린 비에 우산을 들고 나와줄 사람이 없을 때였다.


그때는 편의점도 이렇게 흔치 않아서 비 오는 날 우산을 쉽게 살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시시때때로 날씨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침 뉴스를 놓친 날에는 ‘갑자기’ 비가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왠지 지금보다 소나기가 더 빈번히 내렸던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일까? 아무튼 나는 외동딸이고,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일을 다니셨다. 운이 좋아 엄마가 잔업을 하지 않고 일찍 퇴근 한 날 비가 오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엄마가 우산을 들고 서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은 날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을 머리에 올리고 장대비 사이로 마구 뛰어야만 했다. 중간중간 가게들의 처마 아래에서 10초씩 숨을 고르고 다시 뛰고, 또 숨 고르고 또다시 뛰고. 맞은 비를 닦아내며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올 때의 기분은 그다지 상쾌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맞으면 좋을 리가 전혀 없을 것 같던 비도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나 보다. 비가 올 때마다 매번 떠올리게 되는 기분이 좋았던 순간들도 있다.


입사 후 처음 맞이한 여름휴가. 절친과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동남아 여행은 처음이라, 스콜이라는 것이 있다고만 들었을 뿐 크게 와 닿진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친구와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무지막지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스콜이었다. 우산을 쓰는 건 의미가 크게 없었다. 사방에서 내리치며 들어오는 비는 처음이었다. 오히려 우산은 이리저리 저항력만 세져 버티기가 더 힘들 뿐이었다. 우리는 우산을 접고 온몸으로 맞으면서 근처 지하철역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비와 함께 웃음도 터져 나왔다. 어찌나 후련하고 또 어찌나 웃기던지. 주변의 태국 사람들은 뭐가 그리 웃기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비도 웃음도 틈새를 마구 비집고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우레와 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은 매번 이 날 생각이 난다. 나와 친구 사이에는 우리고 또 우린 사골 같은 이야기지만, 얘기할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은 그때 느꼈던 카타르시스를 또 한 번 가져다준다.


두 번째 기억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올해 6월, 인생의 첫 신혼여행지로 꿈꿔왔던 탄자니아행 여행을 뒤로 미루고, 제주도로 향했다. 코로나는 나와 20살은 족히 차이 나는 팀장님의 신혼여행 풍경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설상가상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비 소식이 있었다. 어차피 숙소 안에서 빈둥댈 계획이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비가 온다니 뭔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날도 오전부터 비 소식이 있었지만, 우리는 꿋꿋이 호텔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야외 수영장에는 우리와 다른 한 커플만 있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서로를 끌어주다가, 또 각자 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물 표면에 둥둥 떠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면 뭐랄까, 굉장히 고요하고 또 낭만적인 기분이 든다. 구체적으로 어땠다,라고 표현할 특별한 장면은 없지만, 분명한 건 이 우주에 우리 둘만 둥둥 떠있는 느낌이었다. 참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오늘은 기상청의 예보와는 다르게 비가 쏟아지는 수요일이다. 출근할 때 우산을 챙기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출근한 지금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냥 아름답다. 괜히 잘 모르는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잘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 아침이다. 비처럼 사람들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좋았다 싫었다, 원했다가 원망했다가, 하는 대상이 있을까. 내가 비라면 사람들의 마음이 헷갈릴 것 같다. 오늘은 헷갈리던 차에 누군가 비가 오길 간절히 원해서 갑자기 하루 일찍 비가 내려온 걸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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