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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Aug 06. 2020

나만의 와인 테이스팅 노트를 남겨야 하는 이유

막연했던 감상을 구체화하여, 취향의 와인을 찾아가기


2017년 12월 28일부터 2020년 8월 6일 오늘까지, 내가 비비노 앱에 남긴 테이스팅 노트는 총 610개.

2017년 11월 1일부터 지금까지 #수진와인일기 라는 해쉬태그로 남긴 테이스팅 관련 피드는 얼추 200여 개.


일종의 기록병이 있는 나는, 와인뿐만 아니라 책, 캠핑, 여행 등 내가 경험한 것을 어디든 세세하게 기록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에는 굉장히 호흡이 길어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TMI 식 나의 기록은 사실은 남을 보여주기 위한 것보다 내가 기억하기 위함이 더 크다. 기록해 두지 않아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들 많이 생각하지만, 실상은 기록하지 않으면 심지어 ‘내가 이 경험을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 같은 굵직한 것조차 잊히기 마련이다.


하다 못해 여행 속 사소한 에피소드나 책도 그러한데, 큰 갈등이나 구체적인 사건 없이 감상하는 와인은 오죽할까. 나만의 감상과 느낌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레드 와인은 레드요, 화이트 와인은 화이트일 뿐이다. 감정의 기억은 놀랍도록 쉽게 증발된다. 게다가 와인 이름과 레이블, 내가 마신 와인의 빈티지는 어찌나 외우기가 쉽지 않던지. 나는 다 기억할 자신이 없어 기록하기를 택했다.




이러한 이유로, 와인을 이제 막 좋아하거나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무조건 개인 테이스팅 노트를 남기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이유는 명확하다. 막연했던 나의 감상을 구체화하여, 나의 취향을 알아가기 위함이다.


첫째로, 표현해서 쓰거나 말하지 않으면 그 감상은 정말 모호하게 남는다. ‘그 와인 맛있었던 것 같아’, ‘그 와인 별로였어’ 이런 식의 단편적인 인상만 기억된다. 실제로 테이스팅 노트를 적지 않은 날은 다음 날 일어나서 그 와인의 감상을 다시 써보려고 해도 좀처럼 써지지가 않는다. 그러면 참 남는 게 없는 느낌이다. 마시긴 했으나, 경험했다고 치기가 힘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 와인 어땠냐고 물어보면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왜 좋았는지, 왜 싫었는지 생각해 보아도 이유를 딱히 잘 모르겠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취향을 알기 위해선 계속해서 감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앞의 표현을 ‘그 와인은 열대 과일의 향이 많이 나서 맛있었던 것 같아’, ‘그 와인은 뒷 맛이 탄산수 같이 맹한 맛이 있어서 별로 였어’ 등으로 조금이라도 더 구체화를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마셨던 그 맛과 향이 머릿속에 쉽게 상기가 되면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두 번째로는, 내 취향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쌓여야 한다. 1~2개의 와인을 마시고 내 취향을 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내가 10개의 와인을 마셨다면, 최소 2개 이상의 경향이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와인은 레드인데 신맛이 많이 나고, 저 와인은 같은 레드인데도 단맛이 많이 난다 라거나, 이 와인은 마실 때 거북한 느낌이 드는데, 저 와인은 주스처럼 잘 넘어간다는 등의 큰 경향성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향성에 대한 나의 호불호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두면 나중에 내가 다 기억을 하지는 못 하더라도, 기록을 통해 내가 불호라고 느꼈던 그 와인을 다시 마시거나, 그와 비슷한 와인을 마시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와인은 같은 생산자의 와인이더라도 포도를 재배한 밭에 따라 와인의 특성이 달라지기도 하고, 또 같은 와인이더라도 포도를 재배한 빈티지에 따라 맛과 향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해 둘수록 나의 취향을 찾을 확률은 더욱 높다. 내가 더 좋아했던 그 빈티지나 그 밭, 그 생산자가 곧 나의 취향이다.


더 재밌는 것은, 취향도 변한다. 한참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을 시절, 스파클링 와인의 차이를 별로 못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이 샴페인이랑 저 샴페인의 차이도 모르겠고, 샴페인이랑 까바의 차이도 잘 몰랐다.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 별 감흥이 없었다. 대신 마시면 배가 따땃해지는 묵직하고 파워풀한 남성적인 레드 와인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나의 테이스팅 노트에는 샴페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기록해 두지 않으면, 나의 취향 변화에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좌) 나의 초초초창기 와인 테이스팅 노트. 참 짧다. (우) 최근의 와인 테이스팅 노트. 구체적이다.


그러면 테이스팅 노트를 어떻게 써야 할까. 정답은 없다. 간략하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첫 테이스팅 노트의 주인공은 ‘Chateau Saint Jacques d’Albas Le Petit Saint Jacques 2015’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묵직함’ 이렇게만 적혀있다. 지금 보면 정말 쓸모없어 보이는 한 줄 감상이지만, 이 한 줄이 없었다면 뒤의 609개의 테이스팅 노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나의 테이스팅 노트는 2018년에 마셨던 ‘G.H.Mumm Brut Champagne N.V’에 대한 것이다. 이때 이후로 나의 감상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확신한다. 겁도 없이 블라인드 테이스팅 모임에 참석을 했던 그날, 소믈리에 분이 레이블을 가린 채 와인을 따라주고는 어느 나라의 와인 같냐고 물었다. 한 모금을 마셨는데, 얼마 전 전시회에서 보았던 반 고흐의 밀밭 그림이 내 머릿속에 쫙 펼쳐졌다. 그래서 반 고흐가 머물렀던 아를을 생각하며, 프랑스라고 대답을 했다. 정답이었다. 그때의 나의 마음속 심상과 와인의 풍미와 반 고흐의 밀밭 그림이 하나로 어우러졌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와인에 대한 감상은 나의 경험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의 테이스팅 노트를 보면 ‘엄마가 심어놓은 작은 화분들로 이루어진 발코니 정원’, ‘오래된 장독대 향’, ‘초등학생 때 운동장에서 따서 먹었던 꿀이 든 사루비아 꽃’ 등 경험에서 나온 표현들이 많다. 그렇게 나의 언어와 나의 경험으로 기록해둔 테이스팅 노트는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아도 그때 기억을 선명하게 가져다준다.



반 고흐, <붓꽃이 있는 아를 풍경>


와인을 기록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취향을 되짚어보는 과정이고, 그로써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함이다. 와인이 유독 혼자 마시는 것보다 같이 마시는 게 좋은 이유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감상을 남길 수 있음에 있지 않을까. 나의 감상을 말로 표현해 보고, 서로 주고받으며, 그 표현들을 기록해 나간다면 무작정 마시는 것보다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오늘부터 나만의 테이스팅 노트를 기록해 보는 것은 어떨까. 와인을 마시고, 기록하고, 후에 그 기록을 보며 추억에 잠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즐거운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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