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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Aug 19. 2020

결혼 후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닌 ‘엄마 집’을 나서며


다들 결혼 전에 엄마랑 얘기하다가 많이 운다고들 했다. 그래서 내게 결혼 전날 울지 말고, 전전날 다 울어놓고 컨디션 관리하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나는 결혼식 전전날은 엄마랑 평소와 다름없이 투닥투닥 대느라 눈물 흘릴 틈이 없었고, 결혼식 전날은 나는 안중에도 없고 사람들이랑 통화하느라 바쁜 엄마에게 서운하면서도 짜증이 솟구쳐 또 눈물 흘릴 기회를 놓쳤다. 전화통만 붙들고 있는 엄마를 보고 더 이상 보고 있으면 싸울 것만 같아서, 나는 갈까 말까 고민을 마치고 결혼식 전날 신혼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살았던 하루로 기억될 날이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신혼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홀가분하면서도 무거운 양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엄마와 정말 매일을 입씨름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크게 싸우는 모녀지간이었던지라, 헤어지는 것이 꼭 슬프지만은 않았다. 서로에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 즈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힝구(우리의 애칭), 장모님 전화로 엄청 우셨어. 잘 살라고, 잘해주라고’


우리 엄마는 일종의 패턴이 있는데, 뭐가 그렇게 서러운 지 한번 울면 정말 홍수가 난 듯이 운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엉엉 소리 내며 우는 걸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엄마는 본인의 형제와 싸울 때에도, 나랑 심하게 싸울 때에도 언제나 저렇게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후레자식, 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의 울음소리가 지긋지긋했다. 대학생 때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명백하게 엄마가 잘못했을 때도 엄마가 우니까 달래려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꼭 엄마는 내게, ‘너 잘못했지. 다신 그러지 마’라고 답했다. 저 말에 복장이 터지고 울고 싶은 건 나였다. 그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나는 이제 엄마의 눈물이 지겨워지고야 말았다. 오기로 우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어, 나 역시 오기로 죽어도 달래주지 않았다. 그러면 몇 날이고 몇 주고 말조차 걸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마당에, 엄마가 사위될 사람에게 전화해서 엉엉 울었다니, 안쓰럽기보다는 ‘엄마가 또’라는 생각이 들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쨌든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상투적으로 달랬다. 이때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난감했다.


결혼식 날에도 친구들이 엄마 얼굴을 보지 말라고 말했다. 눈물 흘릴 거라고, 그러면 사진이 안 예쁘게 나온다고, 너무 많이 울면 시댁에서 안 좋게 생각할 수 있다고. 잔뜩 긴장을 했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마케터로 10년을 일해온 나에게, 나의 결혼식은 하나의 행사 같았다. 내가 준비한 일 년짜리 거대 프로젝트. 식전 음악은 잘 나오는지, 식전 영상은 끊김이 없는지, 나의 비밀 축가 MR은 신랑에게 들키진 않았는지, 친구들의 축가는 잘 준비되었는지, 행진곡과 입장 곡도 아귀가 잘 맞는지, 꽃은 시들지 않고 생글하게 잘 있는지, 우리 엄마는 순서를 잘 숙지하고 있는지 등등 신경 쓸 게 참 많았다. 그래서 버진 로드에 오른 그 순간에도 마치 행사의 마스터 같이 하객들의 얼굴 하나하나 다 살펴볼 정도로 긴장감이 없었다. 남편과 행진할 때에는 이제 밥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생각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났다. 다행히 우리 엄마도 연신 싱글벙글한 내 얼굴을 두고 울 수는 없었나 보다. 그렇게 눈물 없고 웃음만 있는 결혼식이 끝났다.


신혼여행을 가서는 당연히 눈물 흘릴 일이 없었다. 제주도지만, 그래도 결혼 준비하느라 그동안 제대로 못 놀았던 우리에게는 꿀 같은 휴가였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의 쳇바퀴였다.


그런데 눈물은 이상한 데에서 터졌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엄마랑 같이 밥을 먹고, 인사하고 시댁으로 향하던 중 뜬금없이 눈물이 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나왔다. ‘오빠, 나 왜 이러지?’하면서도 계속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닌 ‘엄마 집’을 나서 시댁으로 향하는 그 어둑어둑한 저녁의 도로에서, 왜 때문인지 나는 이런 헤어짐이 엄마에게 더 좋은 것 일지, 안 좋은 것 일지를 생각했다. 나같이 한 번도 안 져주는 딸, 어디서 밖에서 싸우고 오면 엄마 편을 들기보단 명명백백히 잘잘못을 가리던 딸, 맨날 놀러 다니느라 12시까지 집에 들어오지도 않던 딸이 이제 영영 가버리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고 홀가분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이제 나마저도 없으면 우리 엄마 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 더 삶의 의지를 잃고 무너져버리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냥 부디 더 좋은 방향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기도했다.


떨어져 있으면 더 애틋해진다고 했나. 그 말은 우리 모녀지간에 완벽히 해당한다. 그날 이후, 물론 남편 앞에서도 투닥거리는 것이 빈번했지만, 어쨌든 떨어져 있으면 서로를 더 살뜰히 챙기게 된다. 괜히 카톡 한번, 전화 한번 하며 안부를 묻는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양도해 준 요가를 인생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감정이 몹시 불안하고 우울해 신체까지 방치했던 우리 엄마는, 요가로 인해 삶의 중심을 찾아가는 중이다. 엄마가 요가를 다니고 난 뒤,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대화거리가 더 풍부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도, 나도 서로 때문에 울지 않는다. 눈물 끝, 행복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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