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분유 파동으로 인해 '메이드 인 차이나'는 중국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었는데, 특히 얼굴에 직접 닿는 화장품 시장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브랜드들도 생산 리드 타임을 줄이고 원가를 개선하기 위해 중국에서 생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논의가 진행될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조건 '메이드 인 코리아'여야 한다고 결론이 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시장은 변한다.
2016년만 하더라도 무조건 '메이드 인 차이나'는 안 된다던 시장이 바로 화장품 시장이었는데,
이제는 中国制造, 즉 '메이드 인 차이나'가 적힌 제품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요즘 중국 Gen Z 세대에서 가장 흥하고 있는 트렌드는 바로 国潮, 즉 애국 트렌드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적힌 모든 물건은 그들의 머스트 헤브 아이템이 되고 있다.
'애국'과 'Gen Z'라니, 이 놀랍도록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런 애국 트렌드에 맞추어 중국 로컬 화장품 브랜드들도 애국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중국향을 잘 담아내고 있는 중국 로컬 메이크업 브랜드 화서자
제대로 된 중국향을 보여줄게, 장인의 솜씨 화서자(花西子)
작년 광군절에 처음 얼굴을 비추고, 올해 광군절 화장품 부문 카테고리 15위를 차지한 브랜드가 있으니, 요즘 중국 Gen Z들에게 아주 핫한 '화서자'라는 중국 로컬 메이크업 브랜드이다.
화서자의 화는 꽃 화花, 서자西子는 항주의 서호와 중국 고대 미녀 중 하나인 서시를 의미하는데, 이는 항주에서 존경받는 문인이자 정치인 소동파의 시구에서 비롯되었다.
“欲把西湖比西子,淡妆浓抹总相宜”
'서호를 서시와 비유하자니, 옅은 화장이나 짙은 화장이나 모두 잘 어울리는구나'라는 의미로 서호와 서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구이다.
브랜드 이념은 '东方彩妆,以花养妆'로 '동양의 메이크업, 꽃으로 화장하다'라는 의미이며, 중국의 천년 고도 지혜를 통해 동양 여성에게 적합한 색조 메이크업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본사가 위치한 항저우부터, 항저우의 주요 명소인 '서호', 항저우의 역사적 인물인 '서시'와 '소동파'를 엮어낸 브랜드 콘셉트와 비전, 제품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이 브랜드를 보고 있노라면 중국의 화장품 기업들이 이제 제법 브랜딩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브랜드가 처음 성공한 것은 리지아치 즐보를 통해서였는데, 중국향을 잘 표현한 브랜드로 중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제품에 새겨진 봉황, 꽃, 병풍 등의 각인은 조각 대가와 협업하여 현대적인 기술을 통해 구현했고, 제품명이나 제품 포장 등에서도 중국의 고풍을 표현하고 있다. 중국 소비자들은 디자인에 대해 완전히 예술 공예품으로 인식하고 있다.
장인급의 각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제품에 새겨진 각인 수준. 복각화루연지고법이라는 어려운 말을 제쳐놓고 이 제품만 바라보면, 거의 사람이 직접 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공예 재질이다. 잠시 잠깐 중국은 사람도 많으니 공장에서 사람들이 저걸 핀으로 파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의 각인 수준.
제품명과 홋수명, 그리고 제품에 새겨진 각인들이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도 몹시 놀라웠는데, 예를 들어 팔레트는 봉황이 백조의 은혜를 입어 화려한 깃털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의 <백조조봉>을 세밀하게 조각하여 그려냈고, 각 홋수 이름도 공작새 깃털(孔雀羽), 금실 깃털(金丝羽), 꾀꼬리 깃털(鹰飞羽), 화미조 깃털(画眉羽), 봉황 열쇠(凤凰钥), 흰색 깃털(白酱羽), 기러기 깃털(惊鸿羽), 붉은 참새 깃털(朱雀羽), 제비 깃털(沙燕羽)로 백조조봉의 스토리를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제품의 컨셉, 제품명, 홋수명을 아우루는 중국향
파우더 팩트의 경우는, '샌드 베이지' 컬러에 착안하여 문화 교류의 길, 실크 로드를 그려 넣어 동서 교류의 번성함을 표현함으로써 중국의 과거에서부터 미래로까지 이어지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달에 출시한 신제품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인데, 도자기 공법을 사용하여 립스틱의 용기를 도자기로 만들어 출시했다. 도자기 공법을 균일한 품질로 대량 생산해낸 것도 놀랍고, 중국이 갖고 있는 문화적 소스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힘도 놀랍다. 그리고 이에 보답하듯 중국 소비자들의 반응 또한 뜨겁다. 중국 소비자들이 화서자에 대해 리뷰할 때 많이 쓰는 구절이 있는데, '国货之光'이라는 구절이다. 직역하자면, '국산품의 빛'으로 화서자는 국산 브랜드의 자존심처럼 여겨지고 있다. '애국'과 '중국 문화'적 요소를 정말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브랜드로서, 2021년 광군절의 매출이 몹시 기대되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12월에 출시된 화서자의 신제품 립스틱. 도자기 공법을 활용하였다
매번 색다른 콜라보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퍼펙트 다이어리
중국 로컬 화장품 브랜드의 콜라보레이션 서막을 열다, 퍼펙트 다이어리(完美日记)
중국 브랜드의 콜라보레이션에서 이 브랜드를 제쳐놓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년 광군절 로컬 화장품 1위, 올해 2위를 차지한 꼭 주목해야 하는 브랜드, 바로 '퍼펙트 다이어리'다.
완벽한 일기, 이게 무슨 의미를 담은 브랜드 명인가 싶었는데, 브랜드 이념과 비전, 애티튜드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美,不应该是高不可攀的昂贵, 而是每个人都能触手可及的日常”
"아름다움은 닿을 수 없을 만큼 비싼 것이 아니라, 누구나 손댈 수 있는 일상이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完美日记를 통해 매일 완벽한 일상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스스로를 타파하기 위해 더 노력하고, 인생의 더 많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며, 더 나은 자신을 만나라고 끊임없이 선도하는 브랜드로 젊은 층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브랜드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색적인 콜라보레이션부터였는데, 작년 디스커버리와 콜라보레이션한 동물판 아이섀도 팔레트와 중국 지리판 아이섀도 팔레트, 올해 중국 우주 비행 브랜드와 콜라보한 동물판 2세대 옥토끼판 아이섀도 팔레트 모두 연달아 엄청난 바이럴을 만들며 성공했다.
그중 '애국'적인 요소를 제대로 담아낸 중국 지리판 아이섀도 팔레트와 옥토끼판 아이섀도 팔레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의 자연경관을 담은 중국국가지리와의 콜라보레이션
중국 지리판은 1950년부터 창간된 중국 과학 저널 中国国家地理와 콜라보레이션한 것으로, 중국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16색으로 구성된 아이섀도 팔레트로 총 4개 홋수가 출시되었는데 메인 비주얼부터 제품까지 아름답게 제작되었다. 붉게 물들어 산언덕을 찬란하게 내리쬐는 노을빛을 담은 赤彤丹霞(붉은 노을), 분홍색 노을이 광활한 산맥을 휩쓸고 뭇산들의 검푸른 빛깔이 서로 눈부시게 비치는 모습을 담은 粉黛高原(분홍빛 검푸른 고원), 푸른 호수를 담은 碧蓝湖泊(짙푸른 호수), 막 떠오르는 붉은 해가 계단식 밭을 겹겹이 쌓아 여러 색을 만드는 것을 표현한 焕彩梯田(환히 빛나는 계단식 밭) 이렇게 네 가지 홋수로 구성되어 있다.
메이크업 룩을 보면 소수민족 느낌도 나는 것이 쉽게 바르기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매번 패션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만 생각해 왔던 나로선 이런 콜라보레이션이 굉장히 참신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중국의 아름다운 경관들을 함께 홍보할 수 있으니 관광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이것이야 말로 일석이조, 일석다조의 문화 콘텐츠가 아닌가 싶다.
중국 우주 비행 스토리를 담은 옥토끼판 아이섀도
올해 광군절을 겨냥하여 나온 옥토끼판 아이섀도 팔레트는 중국 우주 비행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한 것인데, 개발 배경이 또 모옵시 재밌다. 2020년은 중국 우주비행의 해로 5월에 장정 5호라는 우주발사체가 첫 비행을 했고, 7월에 최초의 화성탐사선 천문 1호가 우주로 출항함에 따라 중국의 첫 행성 탐사가 시작된 해다. 그를 기념하고자, 옥토끼란 이름의 중국 달 탐사차와 중국의 옥토끼 설화를 결합하여 이번 콜라보를 출시한 것이다. 국가적인 행사를 녹여서 콜라보레이션을 하다니, 우리나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각 홋수 이름도 옥토끼, 오리온성운, 안드로메다성운 등 성운으로 풀어냈고, 역시나 소화하기는 매우 힘들겠지만 전체적인 테마에 맞추어 우주 메이크업 룩을 선보였다. 이런 것들이 엄청난 바이럴을 일으키며, 출시한 지 하루 만에 #完美日记玉兔盘" 태그가 1억 개를 돌파하는 폭발적인 결과를 얻었다.
매년 618과 광군절 때마다 이색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애국 트렌드를 선보이는 퍼펙트 다이어리(完美日记). 내년 618과 광군절에는 또 어떤 콜라보를 선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중국 더마 스킨케어 브랜드 위노나
중국인의 피부는 중국 브랜드가 제일 잘 알아, 중국 운남의 더마 스킨케어 브랜드 위노나(薇诺娜)
올해 광군절 중국 로컬 화장품 1위 브랜드, 전년 대비 105% 성장한 브랜드가 있으니 바로 위노나다.
위노나는 중국 더마 스킨케어 브랜드로서 2008년 공기 좋고 물 좋은 윈난 성의 쿤밍에 설립된 회사로, 모기업이 윈난 바이오테크놀로지다. 윈난 바이오테크놀로지는 2010년부터 지속해서 중국 피부 관리 대건강 사업을 추진해온 이력이 있는데, 이런 이력이 위노나 브랜드에도 힘이 되고 있다.
운남성이 워낙 깨끗한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보니, 운남의 약초들과 의학적으로 증명된 더마를 중심으로 스토리 텔링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효능이 정말 중요한 더마 카테고리인데 왜 굳이 중국 로컬 브랜드인 위노나가 인기가 많은지 정말 궁금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국도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감성 피부 스킨케어는 오랫동안 외국 브랜드가 점유했던 영역이라 로컬 브랜드가 낄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위노나는 피부학 전문가팀을 구성해 128편의 퀄리티 있는 학술 논문 발표, 2019년 밴쿠버 제24회 피부과 대회에서 성과 획득 등을 통해 '중국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줌으로써 중국 소비자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있다.
특히나 중국인 3명 중 1명이 민감성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데, '중국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트러블 피부를 해결한다'는 사명감으로, 특히 여드름 같이 피부 고민을 가진 Gen Z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듯하다. 중국인 피부는 중국 브랜드가 제일 잘 잘아, 이런 느낌.
위노나 x 중국 우편 콜라보레이션
위노나가 올해 618에 중국 우편과 작업한 콜라보레이션이 또 재미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프리메라가 우체국이랑 콜라보를 한 느낌인데, 왜 굳이 우체국이랑 콜라보를 했을까? 이 역시 国潮(애국), 中国制造(메이드 인 차이나)의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 우편은 중국의 특색이 잘 녹여진 '우표'라는 제조품이 있기 때문에, 중국 우편과 위노나는 양대 '메이드 인 차이나'끼리 콜라보레이션을 한 것이다. 제품에는 위노나의 레드와 중국 우편의 그린을 조화롭게 조합했으며, 중국 우편과 콜라보를 통해 기념 우편집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중 위노나 전용 우표는 신중국 성립, 개혁개방, 사스 반격, 북경 올림픽 등 중국의 역사적인 사건을 운남성의 특별한 식물들과 연결하여 민족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과 국민에 대한 수호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퍼펙트 다이어리에 이어 또 한 번 국가적 행사를 녹여낸 콜라보레이션이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 Gen Z들 사이에서 中国制造(메이드 인 차이나)가 쓰인 아이템들이 굉장히 인기를 얻고 있는데, 위노나 x 중국 우편 콜라보레이션의 판촉물들도 보면 그런 흐름을 반영하듯 中国制造가 쓰여있다. 이런 애국의 트렌드와 코로나로 인한 민감성 피부의 대두로 인해 위노나는 중국 Gen Z들이 사랑하는 유일한 스킨케어 브랜드로 뽑혔으며, 올해 광군절 1위를 하게 된 것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를 반영한 판촉물들
중국 로컬 메이크업 중심의 화장품 편집샵 와우 컬러
강해지는 중국 로컬 화장품 브랜드, 중국 시장 내 한국 화장품의 위기
사실 중국풍의 디자인이나 브랜드들은 이전부터 쭉 있어왔지만, 왜 요즘 이렇게 더 눈에 잘 띄고 흥하는 것일까.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 소비자들조차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중국 브랜드들은 지속적인 성과를 내고 있고(위노나가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내고 있듯이), 또 중국의 Gen Z 세대는 특히나 중국인으로서의 문화적인 자긍심이 있는 세대이기 때문에 이런 중국향 브랜드와 제품들이 최근 유독 더 잘 통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중국은 국가적으로 중국 제조 2025를 기조로 내세우며 중국의 제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화장품 시장도 발맞추어 나가고 있고, 급기야 올해 1월 중국 로컬 메이크업 제품에 집중된 화장품 편집샵인 'WOW COLOUR'도 런칭되었다. 2020년에 500개 이상의 매장 오픈, 2021년까지 1000개 매장을 오픈하는 것이 목표인 만큼 지속적으로 중국 로컬 브랜드의 힘은 강화될 전망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중국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가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은 갈수록 글로벌 외사 vs. 중국 로컬의 흐름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 화장품 기업에 많이 넘어갔었으니, 점점 더 중국 로컬과의 기술력 차이는 줄어들 것이고, 중국은 '메이드 인 차이나' 기조를 계속해서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 회사의 위기를 넘어선 한국 화장품의 위기라고까지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