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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훈 Mar 26. 2020

짬뽕은 늘 그곳에 있다

 2005년 여름 나는 스무 살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자취를 했다. 그렇게 전에 없던 자유가 찾아왔다합법적으로 내 주민등록증을 내고 술을 살 수 있다니왜인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20년 인생에 처음으로 쟁취한 독립은(물론 용돈은 받았지만 그땐 그것도 독립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어른이 되었다는 어떠한 증표 같은 것이었다그러나 도합 12년간의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청산하고 어렵게 얻어 낸 스무 살의 자유는 기껏해야 술과 치환될 뿐이었다소주 댓 병을 가져다 놓고집에서 어머님들이 정성스레 싸 주신 밑반찬과 고기반찬들을 쫘악 펼쳐놓고.

 

 공부 열심히 하며 든든히 챙겨 먹으라고 싸 주신 어머님들의 정성을 초토화시키고 나면 금세 누군가 전화기를 든다. 30분쯤 지나면학생들 먹는 다고 넉넉하게 끓여낸 뜨끈한 짬뽕 한 그릇이 도착한다. 짬뽕 곱빼기 가격이 4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대학가라서 더 쌌을지도 모른다늘 네 다섯 명쯤 자취방에 모여서 술을 먹었으니 일인 당 천 원 정도라면이 지겨웠던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그 이상의 안주는 없었다이미 거하게 한 상 차려놓고 먹었으니그저 얼큰한 국물 한 숟가락에 딸려오는 오징어 조각 하나면 남은 소주에 곁들이기엔 훌륭했다짬뽕과 함께 쓰디쓴 소주를 마시며 음악에 대해 논하고삶에 대해 논했다성인이 되었으니 자동으로 어른도 된 줄 알았다커다란 꿈을 꿨다내가 서른이 되면 위대한 예술가가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지금 내가 바라보는 30대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겉모습은 나이가 들겠지만 마음과 정신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들은 다 세상에 굴복한 것처럼 보였다성공한 나의 30대에는 짬뽕에 소주 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때의 나에겐 미안한 얘기지만난 지금도 자주 짬뽕에 소주를 마신다심지어 해장도 짬뽕으로 한다물론 더 이상 짬뽕 한 그릇을 네 명이 나눠 먹진 않아도 된다그 정도는 성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고급 짬뽕은 아니었다(출처: http://ummayori.blogspot.kr)

        

 짬뽕은 늘 변해왔다지금 당장 동네 중국집 메뉴판만 봐도 짬뽕이라는 이름이 붙은 메뉴가 대 여섯 가지는 될 것이다짬뽕이라는 음식의 특성상 어떤 재료를 올리느냐에 따라 쉽게 변형되고, 그 재료의 맛을 잘 포용한다다시 말해 같은 짬뽕이지만 해물을 넣으면 해물의 얼큰한 맛이 살아나고고기를 넣으면 특유의 감칠맛이 배가 된다어떤 재료가 들어가던, 그 재료를 잘 살려 주는 배경이 되어 준다날카롭지 않은 음식이다


 짬뽕의 출신 성분을 따라가다 보면 짬뽕은 늘 변해왔다는 의견에 더 힘을 실어 줄 수 있다. 짬뽕은 중국의 초마면에서 시작되었다중국의 면 요리인 초마면이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간 화교 천핑순에 의해 일본 화 되면서 잔폰이라는 이름이 붙었고그 잔폰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짬뽕이 되었다고 한다잔폰은 닭 육수를 베이스로 한 하얀 국물에 음식점에서 쓰고 남은 야채와 해물을 듬뿍 넣어 무척 싸고 푸짐한 양을 자랑했다. 잔폰의 주 고객 층이 가난한 항구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그 잔폰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빨개진 건 맵고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렇게 짬뽕은 성장했다또 진화했다하지만 그것이 꼭 음식 자체의 우월함을 말하지는 않는다초마면이 잔폰이 되고짬뽕이 되는 것이 꼭 더 맛있어진 것이라 고는 할 수 없다다만 짬뽕은 언제 어느 곳에 발을 디디고 있느냐에 따라 그곳에 꼭 맞는 옷으로 갈아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래서 오래 살아남았고, 오래 사랑받는다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는 아닐 테지만,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궁극의 맛을 찾는 세계의 수많은 미식가들이 원하는 위대한 음식은 아니지만 늘 누군가는 짬뽕을 찾는다.



잔폰의 원조집인 사카이로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물론 그 곳도 변해왔다


 

 자취방에서 짬뽕 국물과 소주를 마시던 그 때로부터 15년이 지났다결국 위대한 예술가는 되지 못했다스무 살 때 봤던 30대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세상에 굴복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초마면이 잔폰이 되고 잔폰이 짬뽕이 되었듯이 나 또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알맞게 옷을 갈아입으며 세상에 녹아들려 애썼다그리고 성장했다딱히 대단한 인간이 되진 못했지만, 누군가는 평범한 삼십대인 나를 찾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어려 보이고 창피해진다하지만 잔폰이 있었기에 짬뽕도 존재한다잔폰에서 짬뽕이 되었다고 해서 잔폰의 존재 가치가 소멸하지는 않는다잔폰은 잔폰이 필요한 곳에 짬뽕은 짬뽕이 필요한 곳에 존재한다그때의 나에겐 분명 한 그릇의 짬뽕이 필요했다


 이젠 만 원짜리 굴 짬뽕도심지어 만 이천 원짜리 황제 짬뽕도 시켜 먹을 수 있다짬뽕의 종류도가격도 달라졌고짬뽕을 먹을 때의 내 마음가짐도 달라졌다그렇지만 짬뽕은 짬뽕이다계속 변화해왔지만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옷을 입고 있다.

 

걱정 마시라 짬뽕은 늘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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