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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훈 May 28. 2020

의도치 않게 깨달은 기본이란 이름의 맛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해봐야 하는 것이 있었다. 하나는 지금 나의 한 시간은 최저시급과 동일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아르바이트요, 또 하나는 그 정도 돈은 단 2주 만에 탕진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유럽여행이었다. 나 또한 호프집 서빙 알바, 레스토랑 주방보조, 공연장 보조 스텝, 심지어 대리운전까지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힘든 일들을 군말 없이 해낼 수 있었던 건 파리의 어느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상상 속의 내 모습 덕분이었다.

 여행비용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내가 계산했던 유럽여행 필요비용은 오백만 원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디 미슐랭 레스토랑 몇 군데라도 들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노숙을 할지언정 가보고 싶었다.) 그거야 어찌 됐든 나에겐 오백만 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던 셈인데 그 당시 최저시급은 3480원이었다.(충격적 이게도!) 한 달에 이십오 일을 하루 여덟 시간씩 일한다고 치면 월급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은 70만 원 남짓이다. 내게 필요한 오백만 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7개월을 일해야 한다. 불가능했다. 일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한 푼도 안 써야 7개월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조금이라도 사람다운 삶을 살아냈을 경우 대학 졸업할 때쯤이나 떠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무리다. 한 번도 해외에 가보지 못한 대학생에게 반드시 유럽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여권을 들고 비행기를 탈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3개월 정도만 바짝 일하고 떠날 수 있는 곳으로 목적지를 변경하기로 했다. 홀로 떠나기에 동남아의 휴양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니하오밖에 모르는 내가 드넓은 대륙을 여행하기 두려웠다. 일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좋지않은 여행지다.) 한식 이외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일식이다. 일본 드라마를 몇 편 본 경험이 있다. 히로스에 료코의 팬이었다. 일본 여행을 결정하는 데는 이 정도의 명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일본으로 떠났다. 숙소 예약과 관광명소 검색보단 맛집 검색에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한 그런 여행이었다.(물론 아직까지도 이 여행 방식은 내게 유효하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 공항철도를 타고 신주쿠로 향했다. 이렇게 작으면 나처럼 덩치 큰 사람은 받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일본스러운 비즈니스호텔에 여정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신주쿠 거리는 화려하게 번쩍였지만 배고픈 한국인 관광객은 곧장 첫 번째 목표인 라멘 가게로 향했다.

 지금처럼 흔하진 않았지만 그 당시 한국에도 라멘집은 존재했다. 다만 한국식 인스턴트 라면 가격에 익숙한 내게 한 그릇에 구천 원쯤 하는 일본식 라멘은 적어도 한국에선 다가가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기는 라멘의 본고장 일본이 아닌가? 여기서라면 그 라멘이란 음식에 구백 엔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 그러기 위해 지난 삼개월간 소처럼 일하지 않았던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외국에서 지금처럼 구글맵을 보며 길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성껏 프린트해서 챙겨간 지도를 보며 라멘집을 찾아갔다.

 “이랏샤이마세!”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주인장이 힘차게 소리친다. 그 순간 '아 내가 정말 일본에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대학교 식당을 연상케 하는 셀프 주문기가 눈에 띄었다. 자신 있게 다가갔지만 이내 당황했다. 일드에서 주워들은 일본어 몇 마디 하는 게 전부였던 내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그야말로 큰 산이었다. 공항과 지하철이야 영어가 표기되어 있고 친절하게도 한글로 안내된 표지판도 있었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현지인들의 식당. 영어는커녕 사진도 한 장 붙어있지 않았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뒤이어 온 손님들이 줄을 선다. 땀이 흐른다. 나한테 말 걸면 어떡하지... 에라 모르겠다. 천 엔짜리 지폐를 밀어 넣고 왼쪽 첫 번째에 위치한 버튼을 누른다. 다양하고 풍성한 고명으로 유명한 라멘집이라고 했다. 다른 손님들의 그릇은 넘칠 듯한 여러 가지 고명이 얹어져 있다. 내가 주문한 것은 어떤 고명이 올라가 있을까. 그릇을 빼곡히 둘러싼 차슈? 커다란 장어를 통째로 올린 라면도 있는 것 같은데 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불쌍한 관광객에게 아무런 고명도 얹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라멘만을 허락했다. 쇼유라멘이라는 메뉴를 알리 없었던 내가 말린 생선으로 우려낸 듯한 국물에 간장으로 맛을 낸 것 같다는 걸 알아챈 건, 어쩌면 고명의 방해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쇼유라멘



 이튿날, 빈약한 비즈니스호텔의 조식은 건너뛰고 신주쿠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오다큐 선을 타고 후지사와 역에 도착해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 역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써놓으니 열차 몇 번 갈아타는 정도의 가벼운 여정 같지만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도쿄의 지하철을 타봤던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이란 걸 알 테다. 차라리 모험이라 이름붙이는 것이 맞지않나 싶었던 여정의 목적은 그냥 소바 한그릇이었다.

 어찌어찌 후지사와 역에 도착해 에노덴으로 갈아탔다. 플랫폼으로 녹색의 세 량쯤 되는 짧은 기차가 들어왔다. 연륜이 느껴지는 외관의 에노덴 기차는 왠지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친근함을 뽐냈다. 열차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윽고 열차는 덜컹거리며 천천히 출발했다. 몇 개의 역을 지나자 차창 밖으로는 푸른빛 바다가 펼쳐진다. 해안선을 달리는 클래식한 열차라니, 왠지 마음이 들뜬다. 그런데 뭔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이 풍경을 어디선가 본 것만 같다. 아니 그럴 리없다 도쿄의 번화가도 낯설었던 초보 여행자가 갑자기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이 익숙할 리 만무하다. 여행의 설렘이 왠지 모를 익숙함을 만드는가 보다 하며 혼자 미소 지었다. 열차는 천천히 건널목을 지난다.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지고 차단기 앞엔 교복 입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아, 생각났다. 그림에서 본 게 맞다.







소연아!



 그렇게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소바 집에 도착했다. 한산해 보이는 시골길 사이에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다. 나무로 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인 할머니가 나를 반겨준다. 곱게 코팅된 메뉴판을 살펴보니 젠장, 여기도 사진이 없다. 영어도 없다. 튀김 소바가 유명하다고 해서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도무지 어떤 게 튀김 소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 할머니는 내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기다리신다. 할 수 없다. 다시 한번 메뉴판 가장 첫 번째의 메뉴를 주문한다.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역시 가장 기본적인 소바가 나왔다. 고명이라곤 간 무와 파뿐인 그야말로 소바 그 자체. 조금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면을 입에 넣었다. 그렇게 난 메밀 향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봤다. 면을 들고 입안에 넣는 순간 후각을 자극하는 메밀 향은 천천히 씹어 완전히 넘길 때까지 입안과 코 주위를 맴돈다. 신기했다. 자극적이고 이것저것 풍성하게 들어간 음식들만 좋아했던 내게 은은히 감도는 메밀 향은 새로운 감각을 깨워주었다.

 그 뒤로 나는 더욱 자신 있게 메뉴판 가장 첫 번째의 메뉴를 시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에선 우리나라와 다르게 가장 인기 있는 것보다는 가장 기본이 되는 메뉴를 메뉴판 첫 번째에 적어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덕분에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관광객은 일본 음식의 가장 기본적인 맛들을 만끽하며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가끔은 너무 과한 음식이 거북할 때가 있다.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은 것들. 맛있는 걸 다 때려 넣었으니 맛있겠지라는 식의 음식들은 솔직히 말해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참신하고 맛있는 메뉴 개발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닭볶음탕에 꽃게를 넣고 곱창도 넣었으니 그것을 새로운 음식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닭이 가진 맛을 잘 이끌어내서 볶음탕을 끓여냈다면 사실 꽃게나 곱창은 필요하지 않다. 기본적인 맛에 집중해야 그다음 맛을 추구할 수 있다. 말린 생선과 간장으로 맛을 낸 국물이 어떤 맛인지 알아야 거기에 어울리는 고명을 올릴 수 있다. 메밀면이 가지고 있는 향기를 모른다면 어설프게 올린 고명으로 인해 메밀은 그 향기를 잃게 된다.

 기본이란 단어는 분명 심심한 느낌을 준다. 다만 때로는 그 심심한 느낌에 집중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분명 다른 것을 볼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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