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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훈 May 21. 2020

닭볶음탕이 그리운 이유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무척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일생을 경상도 언저리에서만 보낸 사람이었지만,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하다는 세간의 편견은 적어도 아버지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1986년 그의 아들로 태어난 나 또한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와 내가 서울에 자리를 잡은 건 내가 일곱 살 될 무렵이었는데 무리해서 서울 살이를 시작한 이유는 아버지의 어떤 믿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반드시 서울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하길 바랬다. 당신이 더욱 크게 되지 못한 건 근근이 이어오고 있는 사업을 서울에서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은 젊은 시절 서울로 가지 못했던 아버지가  아들을 보며 늘 품고 있던 말이었다.

 내가 유치원을 졸업한 일곱 살 무렵 아버지는 덜컥 서울에 전셋집을 마련했다. 마찬가지로 부산에서 나고 자라 서울 살이 경험이라고는 일천한 어머니였지만 아들을 위한 길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어머니를 설득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어머니와 내가 향한 곳이 외국만 아니었을 뿐 말하자면 ‘기러기 아빠’라는 외로운 길을 당신 스스로 자처한 셈이었다. 평생을 대구에서만 일 해온 아버지의 모든 것은 그곳에 있었다. 아빠도 같이 가자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당신은 머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자주 찾아 갈게’라는 말 뿐이었다.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음식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그 당시로써는 흔치 않은 ‘요리하는 남자’였다. 토요일에 쉬는 것이 당연하지 않던 그때, 아버지는 일주일에 하루뿐인 귀중한 휴일을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것에 오롯이 내놓았다. 대단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가끔은 소불고기를 볶았고 삼겹살을 구웠으며, 어떤 날엔 어디서 배워왔는지 핫케이크를 도우로 활용한 그럴듯한 피자를 오븐도 없이 만들어 내곤 했다.

 우리 가족이 떨어져 살게 된 후에도 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시간을 내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마다 커다란 토종닭과 각종 채소를 바리바리 사들고 와선 닭볶음탕을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도 아버지는 가끔 닭볶음탕을 요리해 주곤 했었는데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때라는 것이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집에 손님이 오셨다거나, 내 생일 이라거나, 큰 계약을 따냈을 때 정도가 아버지의 닭볶음탕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누군가는 '닭볶음탕이 뭐 그리 귀한 요리냐'라고 되묻겠지만, 적어도 아버지에게 닭볶음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요리 중에 가장 그럴듯한 요리였다.

 커다란 닭을 일일이 직접 손질하고 토막 내서 끓는 물에 살짝 삶아 낸다. 삶아낸 닭고기를 물로 씻어 잡내와 닭 비린내를 제거한다.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과정이다.) 감자와 당근, 양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닭고기와 함께 넣고 뭉근하게 끓인다. 간장과 소금으로 간 하고 고춧가루와 고추장, 다진 마늘로 빨갛게 양념해 국물이 적당히 졸아들 때까지 끓인다. 아버지는 닭볶음탕을 끓일 때마다 이게 간단해 보이지만 정성이 많이 들어가야만 맛이 있는 음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귀한 음식이라고도 했다. 그것밖에 할 줄 몰라서가 아니냐는 어머니의 장난 섞인 핀잔엔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며 펄쩍 뛰었지만, 아버지는 축하해야 마땅한 날엔 늘 닭볶음탕을 끓였다. 아버지는 서툰 솜씨로 닭을 손질하고 팔팔 끓은 닭볶음탕의 다리 두 개를 어머니와 내 밥그릇에 얹어주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아버지의 식사는 지난 한 달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맘껏 소주를 비우는 것으로 시작해 주방을 온통 어질러 놓았다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 그것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버지는 그 모든 순간에 무척 행복해 보였다. 대단치 않은 요리 솜씨로 끝까지 혼자 끓여냈던 닭볶음탕은 한 달 동안의 그리움을 녹여내 가족을 위한 정성으로 끓여낸 아버지의 행복이었다.


 내가 열여섯이 되던 해 위태위태하던 아버지의 사업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아버지는 홀로 대구에 남아야만 했던 모든 이유를 잃었다. 서울로 올라올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행여 빚쟁이들이 서울에 있는 엄마와 나를 괴롭힐까 싶어 한 달에 한번 오던 발길마저 끊어버렸다. 무너 가장의 빈자리는 어머니가 채워야만 했고, 난 그렇게 몇 년간 연락이 두절된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그 몇 년간 아버지는 무너져버린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롯이 홀로 책임지고 있었다. 더 이상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지 않게 됐을 때, 그때가 돼서야 아버지는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연락했고, 날 찾았다. 몇 년간 혼자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는 망설이는 내게 그래도 아빠라며 대구행 기차표를 끊어주었다.

 대구역에서 만난 아버지는 무척 야위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원망과 분노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아버지의 해진 옷과 말라버린 얼굴로 금세 연민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724번 버스를 타고 예전 우리 가족이 살던 그 동네로 향했다. 가족에게 돌아올 수 없었던 아버지는 결국 가족의 흔적을 찾아왔다. 두 사람 눕기에도 빠듯해 보이는 단칸방에 가방을 내려놓자 아버지는 잠깐 마트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늘 홀로 잠들었을 아버지의 방 곳곳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어린 나와 젊은 엄마, 듬직해 보이는 아빠가 미소 짓고 있는 가족사진, 엄마와 내가 나온 사진, 어떻게 받았는지 내 졸업식 사진도 한켠에 걸려있었다. 아버지가 홀로 감당했을 외로움의 무게는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퀴퀴한 냄새와 함께 나를 덮쳤다. 그렇게 먹을 것을 좋아하고 요리를 즐겼던 아버지의 냉장고엔 두부 몇 모와 양파 몇 개 그리고 막걸리 몇 병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요리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닭 한 마리와 채소를 사들고 돌아왔다. 다른 손엔 커다란 전골냄비를 든 채로. 그 좁은 방의 부엌 찬장에는 닭볶음탕을 끓이기에 적당한 냄비 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스티커 때지 않은 새 스테인리스 냄비에 물을 끓이며 아버지는 부엌에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냈다. 제대로 된 요리를 하기엔 좁아 보이는 주방에서 아버지는 닭의 잡내를 없애는 중요한 과정을 꼼꼼히 거쳤다. 몇 년 만에 재회한, 이제는 훌쩍 커버린 아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날 닭볶음탕을 안주삼아 처음으로 아버지와 술잔을 마주했고, 아버지는 밤늦도록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난 한동안 닭볶음탕을 먹지 못했다. 빨갛게 물든 닭고기만 봐도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돌아가시기 전 난 아버지에게 서울에 와서 함께 살자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동안 고생한 어머니를 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난 또 그렇게 도망가는 거냐고 쏘아붙였다.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던 불효자는 결국 몇 달 뒤 갑작스럽게 쓰러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힘겨운 시간을 버텨낸 아버지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있었다. 작별인사는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마지막 통화의 죄책감이 그리움으로 바뀌는 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물이 나 먹지 못했던 닭볶음탕은 이제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음식이 되었다.

 어머니와 닭볶음탕을 먹으며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한다. 주방에 들어가 요리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 다정했던 한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이제 소중한 아내를 위해 닭볶음탕을 끓여낸다. 오롯이 아버지의 방식대로 끓여낸 그 닭볶음탕은, 만나지 못해 받을 수 없었던 시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가장으로 빵점이었지만 아버지로선 백점이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한다. 나에게 아버지의 닭볶음탕은 그렇게 남았다. 빨갛게 스며든 매콤한 맛은 아버지의 다난했던 인생과 맞닿아있다. 훌쩍 자라 가정을 꾸린 아들은 이제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아버지가 그립다. 그래서 닭볶음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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