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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훈 May 14. 2020

호텔 조식의 신비

 얼마 전 흥미로운 기사를 본 적이 있다터키의 타이푼 외즈첼릭교수와 미국의 마이클 영 교수가 발표한 올빼미족은 유전적으로 타고난다는 연구결과에 관한 글이었다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십 년도 넘게 하면서 수많은 구박과 핍박에 시달렸던 나에겐 사실 난 게으른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생긴 셈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십 년 동안 집에서 아침밥이란 것을 먹어본 적이 없으며 어린 시절 알바를 구할 때도 시급보다 먼저 따졌던 건 오후 출근이 가능한 일인지의 여부였다어머니를 포함한 내 주위의 많은 아침형(유전자를 가진) 인간들은 그런 날 보며 저렇게 게을러서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냐며 혀를 찼지만난 게으른 게 아니라 아침형 유전자를 타고나지 못한 불쌍한 호모 사피엔스일 뿐이었다물론 어머니에게 이 지식인들의 찬란한 연구성과를 들이민다고 해서 아침마다 날아오는 등짝 스매싱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타고난 올빼미족인 내가 유일하게 유전자의 지시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여행 중 묵게 되는 호텔의 조식 시간이다. 타고난 올빼미족의 유전자는 조식을 주는 호텔에선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식을 먹기 딱 알맞은 시간에 눈이 떠진다이 정도의 상쾌한 기상이라면 '아마 오후 두시쯤 되었겠지' 싶어 시계를 보면 아침 여덟 시 반한국에선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상시간에 당황한다태국이나 미국에선 시차 때문인가 싶다가도 일본엔 시차가 없다는 사실은 호텔 조식이 가진 신비로운 힘을 믿게 한다.

 집으로 통째로 들고 가고 싶은 푹신한 호텔 침구 안에서 눈을 뜬다얼굴에 대충 물을 찍어 바르고 케리어를 열어 적당한 옷을 꺼내 입는다. 만약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서 잠들었다면 그대로 식당으로 향해도 무방할 테다. 객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머리의 상태를 체크한다.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라면 충분하다저녁의 호텔 레스토랑은 격식을 차려야 하는 곳이지만 아침의 그곳에서 멀쩡해 보이는 건 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했는가 싶은 직원들 뿐이다편안한 차림으로 적당한 곳에 앉으면 그 멀끔한 직원들이 와서 커피를 따라준다가벼운 스크램블 에그와 팬케이크를 곁들인 미국식 아침식사를 하든 혹은 버터향이 진동하는 바삭한 크루아상을 잔뜩 가져다 놓고 프랑스식 아침식사를 하든 자유롭다운이 좋다면 지금 당신이 여행하고 있는 바로 그 나라의 전통적인 아침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눈을 뜬 그 순간부터 식사를 마치는 순간까지 골치 아픈 일은 하나도 없다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오늘은 또 뭘 먹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아침부터 분주하게 무언가 만들지 않아도 그 수고를 대신해주는 이들이 감사하게도 그곳엔 존재한다집에선 귀찮음에 카누를 타 먹었지만 이곳에선 잔이 비기가 무섭게 누군가 방금 내린 커피를 다시 따라준다커피 맛이 거기서 거기라며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집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반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에겐 미안하지만 역시 인스턴트커피보단 원두커피가 맛있다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아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물론 이것만으로도 무척 매력적인 일이지만 호텔 조식의 신비로운 힘의 원천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호텔 조식을 처음 먹었던 건 오 년 전 태국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그전엔 여행까지 와서 굳이 아침 일찍 조식을 챙겨 먹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 간의 방콕 여행을 마치고 코 창이란 섬으로 넘어가기 위해 여행자 버스가 출발하는 카오산로드에 짐을 풀었다출발시간은 무척 이른 아침이었기에 적당히 놀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그런데 이상하다카오산로드에 위치한 호텔이기에 좀 소란스럽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사람들의 함성소리는 물론이고 음악소리까지 쿵쾅쿵쾅 울려댔다아직 이른 시간이니 그렇겠지 싶어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 소음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결국 난 한숨도 자지 못했고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짐을 챙겨 로비로 내려갔다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카운터에 따졌다어제 새벽까지 소란스러워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그러자 카운터의 지배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왜 일찍 잤냐고 했다어이가 없었다난 오늘 코 창으로 출발하는 여행자 버스를 타야 하기에 일찍 잤다고 하자 그는 눈이 동그래지며 어제는 할로윈 데이여서 그렇다고 말했다그는 나도 카오산로드에 그 할로윈 파티를 즐기러 온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전혀 몰랐다할로윈이라니그렇다면 어제의 그 소란도 납득이 된다난 할로윈이란 시끌벅적한 젊은이들의 축제날에 이태원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잠을 청했던 것이다할 말이 없었다화는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날짜를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었다한숨도 못 자 몸이 무척 무거웠다버스를 타고 여덟 시간을 가서 또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에 신경은 더욱 날카로웠다호텔에 대한 원망과 하필 이런 때에 이 곳에 와버린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 더해져 벌써 여행을 모두 망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힘겹게 돌아설 때 그가 날 붙잡았다조식을 신청하지 않은 것 같은데 사과의 표시로 무료로 조식을 제공하겠다고시간이 있으면 먹고 가면 어떻겠냐고 했다캐리어를 맡기고 안내를 받아 들어간 조식당은 야외에 있었다지배인의 말대로 투숙객으로 보이는 외국인들은 밤새 파티를 즐긴 듯한 얼굴이었다지배인은 그들과 적당히 떨어진 자리를 배정해주고 직접 커피를 따라줬다뜨거운 커피를 식도로 흘려보내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문득 허기짐이 느껴졌다카오산로드의 허름한 호텔이라 조식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빵을 구워 버터를 발라 먹었고 빵 사이에 햄을 끼워 몇 조각 더 먹었다그리고 따끈해 보이는 죽을 한 그릇 먹었다이상하게도 방금까지 망쳐버린 것 같았던 이 여행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긴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의 시작에 앞서 든든히 먹었던 한 끼는 시끌벅적한 파티 후의 고요함과 어우러져 나의 분노와 피곤함을 너그러움과 설렘으로 치환시켜주었다. 조식의 신비한 힘을 느낀 나는 그 후의 여행기간 동안 유전자의 힘을 이겨내고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아침을 온전히 느끼며 시작하는 여행은 그렇지 않은 여행보다 분명 소중하다.

 

 여행지에서만 작동하는 아침형 인간의 유전자는 한동안 내 몸속 어딘가에서 긴 휴식을 취했다.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올빼미형 유전자에게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침이 그리워 큰 맘먹고 올봄에 떠나려 했던 유럽여행은 코로나와 함께 날아가버렸다호텔 조식의 신비한 힘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되어버렸다

 내게 올빼미로 사는 것은 일상이다마음 편한 아침밥이 주는 편안함은 여행지의 설렘이다. 아마 꽤 오랫동안 난 일상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이 글은 떠나려 했던 나에게 보내는 위로다떠나고 싶은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공감의 글이다이 몹쓸 전염병의 최전선에서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께 경의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떠나고 싶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당부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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