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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훈 Aug 06. 2020

여행지에서 사 온 기념품의 운명

 얼마 전 부엌 찬장을 뒤지다 곱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찬장 구석에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 상자엔 정확한 한글로 ‘베트남 루왁커피’라고 적혀있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삼 년 전 베트남으로 떠났던 신혼여행에서 사 온 기념품이었다. 도저히 귀엽다고는 말할 수 없는 다람쥐 그림이 커다랗게 박혀있는 그 커피를 아직 먹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아직까지 월남이라고 부르는 베트남은 의외로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이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커피의 13%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생산량을 자랑하지만 베트남 국내에서 소비되는 커피 소비량은 7%밖에 되지 않는다. 그 말인즉 생산되는 커피의 대부분은 수출된다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중에서도 기념품으로 소비되는 커피의 양이 상당하지 않을까 싶다. 유명한 관광시장인 벤탄시장에선 모두가 커피를 한아름씩 구입한다. 산더미처럼 커피 상자를 쌓아놓고 쉼 없이 ‘루왁커피 좋아요.’를 외치는 그곳에서 다른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신혼여행의 막바지, 신세를 진 많은 이들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고 있던 우리 역시 제 발로 그 커피의 늪에 들어갔다. 오십 그램에 칠십만 원을 호가한다는 고급 루왁커피가 왜인지 그곳에선 말도 안 되게 저렴했다. 사향고양이가 아닌 다람쥐가 먹고 배설한 커피콩으로 만든 거라는데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할 줄 아는 베트남어라곤 ‘신짜오’ 한마디뿐인 우리 부부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디스카운트 플리즈’ 정도밖에 없었다. 아마 그다지 싸게 구입하지도 못했을 그 커피 상자를 스무 개쯤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섯 개의 커피 상자를 쓰레기통에 밀어 넣으며 갑자기 궁금해졌다. 선물로 나간 나머지 열다섯 개쯤의 커피 상자는 대체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스마트폰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다섯 명을 추렸다. 버렸으면 자신 있게 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친한 친구들이었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다짜고짜 ‘그때 내가 신혼여행 다녀와서 준 커피 먹었냐’고 물어본 나에게 그들은 모두 ‘안 먹었다.’라고 말했다. 그중 한 친구는 먹으려고 열었는데 ‘뭔가 내려먹는 게 귀찮아 보여서 안 먹었다.’고 했다. 그랬다. 난 그 커피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조차 몰랐다.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열어 본 상자에는 원두를 갈아낸 가루와 드리퍼가 함께 들어있었다. 한동안 그것들을 바라보던 나는 ‘내가 선물을 대충 샀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당장 신선한 커피가 내 앞에 있다고 해도 저 조악한 드리퍼로 내려먹으라면 차라리 찬장에서 카누를 꺼내지 싶었다. 커피를 아는 수준이 내게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친구들에게 그런 걸 갖다 줬으니 제대로 내려먹을 리 만무했다. 그 기념품은 커피를 좋아하고 좀 안다 할 만한 사람들에게도 나갔겠지만, 짐작컨대 이 커피는 그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아마 스무 상자의 커피 중에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간 건 많아봐야 한 두 상자 정도뿐 일 테다.     

 

 커피 상자 덕분에 가득 차 버린 쓰레기통을 비워야겠다 싶어 쓰레기봉투로 그것들을 옮겨 담았다. 날카롭게 각져있는 상자 다섯 개를 구겨 넣으려다 몇 개의 봉투를 찢어먹었다. 짜증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안 귀엽게 생긴 다람쥐가 날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난 한 개에 560원 하는 쓰레기봉투를 하나 더 꺼내어 덮어 씌웠다. 이쯤 되면 이건 더 이상 기념품도 선물도 아니었다. 그걸 들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아까 연락했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 녀석은 내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너 내가 보라카이 갔다가 사다 준 잼은 먹었냐?’ 핸드폰을 들고 잠시 생각했다. 몇 개월 전 여자 친구와 보라카이를 다녀왔다며 날 불러낸 녀석은  '악마의 잼'이라 불리는 코코넛 잼 한통을 건넸다. 빵에 발라 몇 번 먹었지만 너무 달아 내 취향은 아니었던 기억이 났다. 냉장고 문을 열어 안쪽을 뒤지자 그 악마의 잼이 등장했다. 하얗게 굳은 잼 위로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뚜껑을 닫아 쓰레기봉투에 던지고선 핸드폰을 들었다. ‘미안, 난 단거 안 좋아해서. 너무 달아서 많이 못 먹겠더라.’라고 써놓고 전송을 누르려는 순간 자기는 믹스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말했던 그 녀석의 커피 취향이 생각났다. 글을 지우고 다시 한번 썼다. ‘당연히 다 먹었지, 달달한 게 빵에 발라 먹으니까 맛있더라.’ 전송 버튼을 누르고 쓰레기봉투를 현관에 던져 놓은 채 소파에 털썩 앉았다. ‘대체 누굴 위한 선물인가.’라고 중얼거리며 쓰레기봉투를 쳐다봤다. 각종 쓰레기로 꽉 들어차 빵빵해진 쓰레기봉투엔 안 귀엽게 생긴 다람쥐와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진 악마 모양이 비춰보였다.

본연의 목적으로 쓰여지지 못한 그것들은 내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난 더 이상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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