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존재
달콤한 연휴가 끝나고 나니 어느덧 시월에 더 가까운 날이 되었네요. 그럼에도 올해 더위는 유난히 성가신 듯합니다. 우리가 지나간 것에 아쉬움을 느끼듯 여름도 그런 마음인 걸까요. 그래서인지 한편으론 마지막 여름의 열기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또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다는 걸 되새기게 해 준 이번 추석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명절날 시골에 찾아가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순화된 언어로 '귀찮은 일'을 포장하고 싶지만, 꽉 막힌 귀성길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순간을 생각하면 가장 올바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가족이 모여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순간, 아침 일찍 일어나 명절 준비를 하는 순간,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있는 순간, 한적한 시골에서 흘러가는 무료한 일상을 떠올리면 명절은 더더욱 기피하고 싶은 기념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저희 가족이 찾아간 곳은 전라북도 고창입니다. 고창은 고인돌과 복분자가 유명한 지역인데요, 그중 할머니 댁은 해안가와 인접하여 갯벌도 볼 수 있고 주위에는 논과 밭이 넓게 트여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에 위치합니다. 광활한 하늘과 대지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진으로 남겨놓으니 한층 더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명절 하면 떠오르는 좋은 것도 있죠. 할머니 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있고 푸짐한 명절 음식을 빼놓는다면 굉장히 섭섭해집니다. 대표적으로 각종 전과 산적 그리고 송편이 있지만,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고향 음식까지 더한다면 명절에 살찌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또는 가족마다 명절에 부치는 특별한 전이 있다면 저희는 동태전과 조개전이 있습니다. 가끔 이것들을 파는 음식점을 발견하곤 하지만 아무래도 할머니 댁에서 직접 해 먹는 맛과 비교할 순 없었습니다. 그만큼 명절 음식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해 갑진년이 유달리 값진 데에는 처음으로 시집을 출간했다는 점이 있는데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괜스레 어른들을 뵙기 꺼려했습니다. 도서 출판이라는 사양 산업에 뛰어든 것도 모자라 경쟁력이 더 떨어지는 시집을 붙잡는 것이 가족들이 보았을 땐 답답하게 느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제 시집을 어렵다고 평하신 분들이 많아 저에게는 배로 곤란한 상황이 찾아올 거라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저만의 상상은 온전히 제 것으로 그쳤습니다. 할머니께선 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었다며 큰일을 해냈다고 자신감을 돋우어 주셨고, 작은 아버지는 오래도록 꿈꿔온 도전을 이룬 것에 대단하다며 내색하셨습니다. 나머지 친적분들은 가끔 장난과 함께 저를 시인이라 칭하며 문인에 대한 자부심을 들춰주기도 했습니다. 가족이기에 힘든 길을 걷는 제게 쉽사리 응원해주진 못하면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덕담을 해주는 것에 가족의 존재를 더욱 느끼게 된 순간들이었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헷갈려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족은 사회적으로 맺어진 특별한 혈연관계라 생각했던 저이지만, 그보다 더 복잡하고 섬세한 정의가 필요한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걱정과 근심에 가려진 가족의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보다 더 헌신적이고 사랑에 가까운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명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귀찮음이 가득했지만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고 난 지금, 몹시 사랑에 결핍을 느끼는 시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충청남도 대천에 위치한 외가를 찾아가는 길은 두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그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가는 동안의 마음은 조금 어수선했습니다. 산가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댁 옆 마당에 차를 들이면, 그 소리를 듣고 저희를 맞이하러 조부모님께서 천천히 걸어 나오십니다. 항상 함박웃음을 지으며 세상 환하게 저희를 반겨주시던 그 모습은 이젠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더욱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현재 외갓집은 폐가가 되었고 정겨운 그곳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외벽은 거의 다 상했고 집안은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난해까지만 해도 감나무와 밤나무에 열린 열매들을 조금이라도 따갔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득 집과 그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신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해집니다. 땅에 떨어져 터져 버린 감들을 바라보며, 창고에 쌓여 썩고 있는 장작들을 지켜본 어머니는 어떤 심경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사라진 고향에 찾아가 그 흔적을 하나둘 떠올리는 일은 너무도 괴로울 것만 같습니다. 차분한 그녀의 뒷모습이 되려 저를 아프게 합니다.
저에게 이번 추석은 한마디로 가족의 존재였습니다. 가족의 사랑이 있기에, 가족의 응원과 관심이 있기에, 가족과의 추억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것을 되새기는 감사한 연휴였습니다. 뜨겁던 여름이 여직 남아있는 것은 이렇듯 가족과의 만남이 강렬하고 눈부시기에 당연한 처사이지 않았을까 위로를 해봅니다. 누구에게는 저와 같이 뜻깊은 연휴였을 것이고, 누구에게는 아쉬움이 많은 연휴였을 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연휴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일 년에 몇 번 없는 대명절을 각자 보내며, 우리 모두 가족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하루만 더 보내고 나면 다시 또 주말이 찾아오네요. 피곤한 일상 하루만 더 힘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