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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날엔떡국 Feb 19. 2023

생각보다 위대한 일, 설거지

병을 줬으면 약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주방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다.

남양주에 있는 본가에서도,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며 자취했던 작은 집에서도 특히 주방 쪽은 나만의 영역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은 볼일을 보거나 목욕을 할 때 들르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과일을 먹을 땐 주로 거실에 들렀다. 그리고 주방은 요리를 하기 위해서 머물렀다.


나에게 요리란 '재료 준비', '조리', '설거지', '뒤처리'라는 과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과정들을 모두 끝내야 요리를 마쳤다고 여긴다. 볶음밥을 할 때 기름을 두른 팬이 달아오르기도 전에 불을 끄고 요리를 끝마치는 것처럼 나의 요리 과정에서 설거지를 빼먹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색한 일이었다. 어릴 적 나의 요리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탓에 요리한 흔적을 쏜살같이 지우려는 행동들이 어느새 신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렇게 주방은 나만의 공간이 되어갔고, 나 또한 주방에 머무르는 시간이 좋았다. 주방을 아끼고 좋아하다 보니 유독 위생을 우선으로 신경 썼다. 싱크대에 접시와 냄비들이 하루라도 쌓여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설거지할 땐 매번 싱크대 배수구 통까지 닦았다. 남들이 알면 놀라는 나만의 장점이 있는데, 사실 나는 집안일 중 설거지를 제일 좋아한다. 오죽하면 마른빨래를 개는 것보다 설거지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런 나에게도 최근 설거지에 관한 골칫거리가 생겼다.


코로나로 뒤덮인 세상부터인가 아님 사실 그전부터인가 끼니를 배달로 때우는 횟수가 늘어났다. 정확히는 배달로 밥을 먹는 것이 일상이 됐고, 직접 요리를 해서 밥을 먹는 것은 특수한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음식을 배달해주니 음식 용기가 따라왔고 편하고자 배달시켜 먹은 나는 어느새 이 용기들을 모아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뉴스에도 그렇고, SNS에서도 그렇고 어딜 가든 환경 문제가 화두 되어 인식이 많이 바뀐 추세이다. 나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환경 지키기 운동에 조용히나마 참여한다는 생각에 이 플라스틱 덩어리들을 깨끗이 세척하는 행위에 대해선 나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문득 드는 생각에 '이렇게 설거지를 좋아하는 나인데도 배달 음식이 담긴 용기들을 다시 깨끗이 설거지하는 일에 귀찮음을 느끼는 데 과연 이 짓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라는 고민을 했었다. 분리수거가 잘 안 된다는 미국의 인구수를 어림잡으며 '내가 하는 분리수거가 과연 지구에 도움이 되긴 하는 걸까'의 생각을 넘어서 배달 용기를 세척하는 행동에는 더한 의심이 가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떡볶이나 닭발, 김치찌개처럼 색이 진하고 기름이 많은 음식이 담긴 용기는 수세미로 아무리 문질러도 닦이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종량제 봉투에 버리기엔 큰 플라스틱 용기라 양심에 가책이 들고, 그렇다고 이것을 닦자고 인터넷을 찾아보며 베이킹소다나 특정 세제를 따로 구매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다. 닦이지 않은 부분을 닦기 위해 세제를 한두 번 더 짜서 세척을 하는 것도 이것이 되려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또한 열심히 세척한 용기가 '재활용 불가'로 취급되어 결국 일반 쓰레기와 함께 놀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배달 용기를 세척하는 것은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주방 접시나 프라이팬을 설거지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 목적인데, 배달 용기를 세척하는 것은 ‘자연을 위함'이 우선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내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두 사람에게 칭찬과 벌을 줄 수 없다. 그래도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생각 한 가지가 있다. '우리는 숨만 쉬어도 내뿜어지는 이산화탄소로 환경 파괴가 더 쉬운 인간이다. 이러한 생명체로서 자연에 보답하려는 행동은 분명 작겠지만, 저멀리 우주 어딘가에서 보면 참으로 위대하고 감명스러운 일이지 아닐까?'라는 가치로 자연을 위해, 모두를 위해, 결국에는 나를 위해 보답하고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 생각보다 위대한 일, 설거지

병을 줬으면 약이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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