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포스트잇을 눌러준다, 다시금 떨어질 걸 알지만
내리는 눈을 보고도 주머니에 있는 손을 빼지 못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창문에 펼쳐진 하늘을 보며 눈이 펑펑 올 거라는 부푼 기대, 잽싸게 뛰쳐나가 누구보다 먼저 첫눈 맞을 준비를 하는 설렌 마음. 어릴 적 우리의 환상은 우리와 함께 늙어간다. 떨어지는 눈보다 바닥에 쌓인 눈을 보는 게 익숙해진 삶이다.
어렸을 땐 참 웃을 일도 많았다. 옆집 친구와도, 같은 반 친구와도, 새로운 친구와도 너도나도 엉겨 붙어 놀던 때가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유치한 나날이었어도 그 시절은 그게 또 세상의 전부였다. 잠시 그때로 돌아가 순간순간을 회상하다 보면 당장 이 모습마저 유치하게 보인다.
학창 시절은 중요하고 소중하다. 길면서도 짧은 학생이라는 순간을 더는 느끼지 못할 날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시절이 그리운 이유는 뭘까? 돈도 없고 시간도 부족한 그때가 더 재밌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추운 겨울에도 외투를 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그랬을까'하며 세월이 야속할 따름이다.
언제부터인가 주위 사람들을 만나길 꺼려한다. 친한 친구, 친척, 가끔은 가족마저도 그렇다. 가족구성원 중 첫째를 맡고 있는 자식으로서 또한 어느덧 스물다섯이 된 사회구성원으로서, 내게 큰 압박을 주지 않는 부모님에게도 눈치가 보여 자꾸만 숨게 된다. 가족 같던 친척 형들과도 이제는 딱히 보고 싶지는 않다, '다들 알아서 잘 지내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니까 같은 학교 이름만 알던 동급생을 친구의 친구로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에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은 이 관계가 나에겐 너무나 불편한데, 더 다가오려는 낯선 이의 노력은 날 더욱 밀어내기만 한다.
"너 주식 안 해? 난 이만큼이나 벌었는데.", "에이 더 먹자, (술잔) 그만 빼", "나 아는 친구 있는데 여기 잠깐 들러도 괜찮지?"
날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엔 본인의 자랑을 위해서, 재밋거리를 찾기 위해서, 맘 편히 이용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우리 모두를 탓하는 건 아니다, 어딜 가든 만연하고 나도 누군가에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테니. 그렇기에 어릴 적 모두가 똑같이 문방구에서 군것질하고 오락하며 철없이 뛰어놀던 그때가 생각나는 것 같다.
웃는 얼굴에 침 뱉기
듣는 사람 없이 대화만 오가는 정치 이야기, 자리에 없는 아무개 험담, 새로 산 명품 자랑. 분명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는 내용에도 웃는 얼굴을 무기로 편하게 내뿜는다. 사실 나는 요즘 만연하는 'MZ세대'라는 단어가 좋다. '웃는 얼굴에 웃으며 침 뱉는 행동'을 정의할 단어가 생겨 비상식적인 행동에 비상식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합법적인 사회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내 행동에 합리화도 할 수 있고 불편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니. 누군가 편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내겐 불편하여 불편하게 받아들이니, 다시 불편하게 대하는 데 이것은 또 편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삶은 단절에 가깝다.
붙어있기보단 떨어지려 하는 포스트잇처럼, 가까워지는 것보다 멀어지는 것이 쉬운 세상이다. 이러한 나의 역동적인 반응과 행동에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끼고 서운함도 생겨 결국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또한 나의 습관적인 행동들이 내가 불편해하던 그들과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스스로의 고립은 그만한 가치가 있지만, 타의에 의한 고립은 엄격하다.
모순된 삶의 연속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다만 가끔은 어지러움과 혼란을 느끼고 나를 보듯 주위를 둘러보며 나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건강한지, 나의 침이 누군가에게 떫은 미소가 되지 않는지 스스로 고립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답안지도 정답지도 없는 세상이지만 고립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이 허물을 벗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한층 성숙한 사람이 되는 우화가 아닐까. 누구에게나 어려운 인생이기에, 답답한 미래이기에, 아쉬운 과거이기에.
내리는 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금방 녹아 사라질 걸 알지만
떨어지는 포스트잇을 눌러준다, 다시금 떨어질 걸 알지만
- 웃는 얼굴에 침 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