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겅질겅
맨얼굴로 실내를 돌아다니니 이제야 마스크 착용 규제가 상당히 완화되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땐 그랬지, 참 불편한 상황이 많았다. 안경을 쓰고 다닐 땐 마스크 위로 올라온 김 서림에 앞을 볼 수 없었고, 장시간 마스크를 착용할 때엔 양쪽 귀가 너덜 해져 갔다. 다행히도 현재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보다 벗을 수 있는 순간이 많아져 왠지 더 활기찬 생활을 보내는 것 같다.
사실 마스크를 속옷처럼 착용하던 이런 날들에, 식사를 마치고도 텁텁한 입을 곧바로 감싸야만 했기에 끊었던 껌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어렸을 땐 껌을 정말로 좋아했는데, '턱이 넓어진다나 두꺼워진다나' 이러한 걱정들에 어쩔 수 없이 금껌을 하게 됐다. 그렇지만 양치를 할 수 없는 불편한 상황에선 '껌 씹기'가 분명한 차선책이었다. 질겅질겅, 10초 정도 씹기만 해도 입 안은 상쾌함으로 가득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껌을 좋아했으니, 껌마다 갖고 있는 특유의 향이 나를 매료시켰다. 사탕∙젤리∙초콜릿에 비해 껌의 향은 강력했다. 학창 시절 남몰래 껌을 씹고 있으면 옆자리 내 짝꿍은 내 입 안에 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곧장 손바닥을 내민다. 어쩔 수 없이 한 개를 짝에게 주었다면 곧이어 하나둘 다가와 똑같이 손바닥을 내민다. 그렇게 껌은 특유의 향으로 우리 모두를 매료시켰다.
껌은 약간의 안정을 불어온다. 그래서 낯선 곳을 갈 때면 항상 껌을 챙겨두는 게 습관이 생겼다. 껌을 감싸 안고 있는 종이를 찢을 때 나는 소리, 하얀 가루가 묻어있는 직사각형의 고무, 딱딱하면서 얇은 고체를 이로 잘근잘근 씹으면 느껴지는 고체와 액체 사이의 무언가. 향기는 추억을 남긴다고 껌은 나에게 추억으로 스며들었다.
나름 껌 애호가인 나에겐 각각의 껌마다 씹는 상황이 따로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에 가야 한다면 후라보노(오리지널)를 챙긴다. 깔끔하면서 상쾌한 향이 특징인 후라보노는 누구든 호불호 없이 좋아할 향이기에, 혹여 어색한 사이일지라도 가볍지만 기분 좋은 쾌적함을 줄 수 있어 이러한 자리에 적합하다.
아침이나 점심을 비롯한 오전 시간, 이때는 아라비카(커피)를 선호한다. 말 그대로 커피 향이 나는 껌인데 단맛이 꽤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커피로 예를 들자면 아메리카노 보단 다방커피와 비슷한 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한 아침에 대신하여 기분을 내는 정도로 이용한다. 사실 편의점 보다 카페를 찾는 일이 더 쉬워진 세상이니 귀찮거나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커피를 이용하기 때문에 활용도는 낮은 편이다.
다음으로 쥬시후레쉬(종합과일)인데 여행 가거나 운동을 하거나 가볍고 즐거운 상황일 때 자주 씹는 껌이다. 맛을 봐보면 이게 정말 과일 맛인지는 갸우뚱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맛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름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이 껌을 잘 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쥬시후레쉬의 껌이 씹을수록 더욱 딱딱해지는 성질이 있어 맛이 빠져버리면 금세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껌이 주는 달콤한 향으로 신나는 마음이 더욱 들뜨기에 쥬시후레쉬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항상 내 가방 어딘가에 뒹굴고 있는 자일리톨-F이다. 같은 자일리톨이라도 차에 타면 씹을 수 있는 자일리톨과는 향이 전혀 다르다. 차에 구비되어 있는 자일리톨은 사과 향이 진한 반면 자일리톨-F는 달달한 맛이 진한 편이다. 후라보노를 사려다 가끔 다른 상쾌함을 느끼고 싶을 때 이 녀석을 구매한다. 아마 가격이 천 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껌이 꽤나 많이 들어있어서, 내가 까먹고 남은 자일리톨이 가방 구석에 잘 돌아다닌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껌은 와우(포도) 껌인데 내겐 희귀한 가치가 있는 껌이다. 예전엔 동네 아파트 상가에 있는 마트에 가면 계산대 앞에 껌들이 줄을 지어 쫙 깔려있었다. 아니면 껌만 진열해 놓은 파트가 따로 있을 정도로 종류가 많았다. 세월과 함께 점포가 편의점으로 바뀌며 껌도 다른 대체재들로 점점 잊혀갔다. 또한 어른이 되고 편의점에 들러, 계산대 앞에 쪼그려 앉아 와우껌을 골라 계산하려고 하니 뭔가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쉽게 손이 가질 않는다. 이유야 어쨌든 어릴 적 친구들과 씹던 달달한 포도향을 이젠 숨겨야 하는 실상이니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들 아직 껌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친구에게 소중한 껌을 건네주었던 때, 아직도 껌을 씹냐며 껌 안 씹은 지 정말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학창 시절엔 뺏기다 못해 숨겨놓았는데, 이제는 건네주어도 외면당하는 쓸쓸한 껌이 되었다. 이렇게 쓸쓸해진 껌과 함께 나도 세상 밖으로 멀어지는 것 같다. 천진하던 그때가 떠오르는 것이 내가 아직까지 껌을 씹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정도는 껌이지
낯선 여행지에서 홀린 커피 볶는 구수한 향
얼떨결에 서점에 들러 구입한 새 책의 향
어렸을 적 호주머니를 향기롭게 해 준 나의 껌들
향기 한 숟갈 덜어 넣은 기억엔
진한 추억이 우러 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