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진적으로, 아름답게
최근 FM23이라는 축구감독 게임에 빠져들었다. 말 그대로 내가 축구감독이 되어 선수를 기용하고 지휘하며 결국 리그 우승 또는 컵 대회 우승 등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게임이다. 덕분에 이불 밑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도 '다음 상대는 프랑스인데 어떻게 이기지..', '포메이션이 4-2-3-1 보다 5-3-2가 맞지 않을까' 하며 마치 거대한 프로젝트 아래 큰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지낸다.
여기에는 선수의 능력치를 세분화하여 수치로 나타낸 자료들이 있는데, 종종 '전성기가 지난 선수'라고 적혀있는 보고서를 받을 때가 있다. 우승이라는 목표를 좇는 냉철한 감독이기에 이러한 선수들은 관리도 잘 신경써주지 않으며 점점 관심 밖의 인물이 되어간다.
하루를 마치고 잘 준비를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수를 하던 와중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발견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전성기가 지난 선수일까'
곧바로 뭔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전성기를 맞이한다는 것'과 '전성기가 지났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언제 꺾일지 모르는 전성기에 그럼에도 열정을 갖고 이 시기를 길게 이어나가려는 의지와, 이미 지나친 전성기에 더는 예전만큼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는 너무나 차이가 크다.
보고서에 적힌 대로 전성기가 지난 선수는 본인이 지고 있다는 것을 알까? 운동선수라는 직업은 능력에 있어서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 이런 세계에서 타인도 아닌 자신과의 경쟁에 한계를 느낀다면 그 순간부터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물론 사람마다 목표와 성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성기가 지난 선수인가? 현실은 게임과 달랐다. 그 누구도 답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질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나이가 듦에 따라 몸과 마음이 늙어가기에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그렇게 우리는 내리막길을 타고 흐르는 바람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스포츠를 하다 보면 그 한계를 좀 더 잘 느낄 수 있다. 분명 눈과 머리는 한걸음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의 몸은 그걸 따라주지 못하는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며 이런 순간이 잦아지고 어느새 인정도 하게 된다.
극적이었던 2022 카타르 월드컵이 끝나고 유퀴즈에 출연하신 손웅정 감독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전성기'란 내려가라는 신호다.
단, 내려갈 때 아름답게 내려가야 된다.
한번에 추락하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점진적으로…
당연한 이야기면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항상 경거망동하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살다 보면 그게 다 도움이 될 거라는 감독님의 말씀이다. 돌이켜보면 거만한 태도로 타인을 바라보던 때가 많았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쭐대며 올라간 낭떠러지는 언제든 추락하기에 알맞았다. 나는 나의 모습이 추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가능한 너그럽고 여유롭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의 전성기가 과연 찾아왔는지, 이미 흘러갔는지, 아직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렇기에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겸손한 자세로 하루하루 소중히.
- 전성기가 지난 선수
점진적으로,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