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에게

at the edge of the universe

by 수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어린이 집에 처음 등원하던 때, 아이는 자꾸 다른 아이들을 물었다. 전엔 잘 웃고, 조심스럽고, 수줍은 아이 었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변화에 내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휴대폰에 어린이집 번호가 뜨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먼저 죄송합니다. 하고 앞서 나갔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원인을 찾았다. 처음 엄마와 떨어지는 충격, 한국어에서 영어로 변환하는 스트레스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직접적으론 자신의 personal space가 침범당한 것에 대한 반응 아니었을까.

토끼털이 보드라운 귀마개를 사주자 아이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건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드는 자극으로부터 아이가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있는 방화벽(firewall) 같은 것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각자의 무의식적 개인 공간을 ‘Personal Space'라고 부른다.
각 문화, 시대, 세대, 성별, 개인 차등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상황별 46cm-3.6m 정도의 물리적 거리다. 타인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긴장, 위협, 불안을 느끼지 않는 일정 거리. 란 설명은 이 개념의 물리적 수치를 넘어 사회적, 심리적, 개인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소심했고 거리를 조절하는데 서툰 나였다. 여자들끼리 화장실을 같이 간다는 생각만 해도 목부터 빨개졌다. 아니 도대체 왜 '그 소리'와 '그 냄새'를 공유하고 싶은 거지?
또래 여자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바라는 거리보다 내 퍼스널 스페이스가 조금 더 넓다는 것, 그래서 자꾸 그 아이들이 넘어올 때마다 차마 물지는 못하고 얼굴이 빨개진다는 걸 알아차린 건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였던 거 같다.

이런 내게도 자꾸 문을 두드리고 쑤욱 들어오던 몇몇 아이들이 있었다. 운 좋게 그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친구가 허수아비 같은 내 팔짱을 낄 때면 나는 끼인 팔을 어찌할지 몰라 빈 주먹만 쥐었다 폈다했다. 팔짱을 당해서 부끄러운 건지 팔짱을 못 껴서 부끄러운지 모르면서, 키스할 때 코는 어디로 가나요. 같은 대사를 떠올렸다.

그러다가도 가끔 어떤 사람에게는 사수하던 경계를 아낌없이 허물었다. 그들은 주로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김중혁 작가의 한 소설에서 "때론 단어 하나만으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그런 문장을 봤었는데, 내 경우가 그런 셈이었다. Nirvana, 응? 그럼 우리 BFF? 그리고는 무턱대고 쑤욱 들어갔다. 결국엔 워워, 너무 들어왔어요. 또는 어이구, 잘못 오셨는데요. 면박당하면서도 꿋꿋이.
대체적으로 내게 두드리는 사람들과 내가 두드리는 사람들이 겹치지 않아 자주 외로웠다. 내 거리의 지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들쑥날쑥하고 여러 층위로 겹쳐졌는데, 그렇게 마음의 길과 담을 잘 내는 것. 깊이와 너비를 잘 조정하는 것.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후에 알았다.

부담스럽더라도 내 서툰 모습이 애틋한 건 무리해서 가까이 다가간 거리만큼 사람을 올곳이 믿던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아니.라고 말하지 못해 빨개진 손바닥을 바지에 쓸던 서툰 아이도, 단어 하나에 의지해 온 세계를 다 꺼내 주고 싶어 하던 부담스러운 소녀도 가끔 보고 싶게 하는 그리움. 그러나 믿음은 종종 상처를 동반한다.

귀마개가 필요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통한다는 기분은 들되, 일상의 나는 상처받지 않는 세계. 하고 싶은 말을 열고 싶은 만큼 열고 맘껏 소리쳐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거리. 그래서 나도 상대도 물지 않고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
처음 생각보다 좀 많이 갔고, 심각하고 부담스러운 소녀가 불쑥불쑥 나왔다.
개인 블로그를 지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있다. 지인들은 내 생활에 너무 가까이 있고, 이 곳은 아직 내 아픔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류하기로 했다.

나와 거리감이 비슷한 몇 명만 예외로 두고, 그동안 이 곳은 나의 비밀 서랍이었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적절한 귀마개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전부터 더 친해지고 싶던 다른 한 친구에게도 나만의 서랍을 열어 보이고 싶어서 넌지시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속내를 궁금해하니까 당연히 보고 싶어 하겠지. 그러면 못 이기는 척 공개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이 얘기 저 얘기하다 슬쩍 흘렸는데, 그녀의 대답이 의외였다.


"제가 그 글 읽고 만약 언니가 안타까워지는 내용이면 그냥 안 볼래요"
분명한 선 긋기. 근데 이렇게 분명하게, 예쁘게 말하는 그녀가 오히려 고마웠다.
마음을 내려놓는 것, 당신을 내 퍼스널 스페이스 안으로 당기는 것은 내가 당신을 이만큼 믿는다는 신뢰의 표시일 수 있다. 하지만 받을 기대를 안 하고 있던 상대에게는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리가 부담일 수도 있다.
자, 내가 이만큼 보여줬으니 너도 이만큼 보여줘야지. 이제 날 위로해줘. 내 마음을 받아줘.
서로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고백은 호의가 아니다.

'안타깝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 읽지 않겠다'는 그녀의 대답은, '당신의 상처를 모른 척하겠어요'라는 거부가 아니라 '당신이 안타깝지 않길 바라요'라는 격려로 느껴졌다.
각자의 손익 계산을 위한 밀당이 아닌, 타인에 대한 관심의 결여가 아닌, 자신이 분명하고 상대를 존중하기에 생기는 여유로운 거리 확보.
나는 잠시 그녀 앞에서 무너지고 싶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내 울타리를 일으켜 세우고 어깨 두드리듯 툭툭 만져주었다.
'적어도 당신은 내게 안타까운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존중으로 나는 위로받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 사이에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porous 했기에 서로 자유로웠다.
여전히 그녀와 나의 거리는 조금 멀지만 그녀는 내가 잠식해야 할 대상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지켜주는 따뜻한 막이다.

나를 중심으로 빙글 도는 원형의 울타리. 그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 닿을 듯 말 듯 나의 그런 그녀들이 있다. 우리의 교차 공간은 보편적인 그것처럼 많이 겹치지는 않지만, 우리는 서로서로 universe의 어깨가 되어 버틴다. 날카롭게 침범하거나 굳게 방어하는 대신 부드럽게 확장할 수 있다. 그렇게 자유로운 경계로 연대할 수 있다.

처음 글을 쓰자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내 안의 상처받은 그녀와 소통하며 치유받고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쓰이지 않았다. 내 글은 그저 나만의 일방적인 내 얘기, 같은 하소연의 동어반복이었고 어떤 이야기도, 인물도 새롭게 창조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내가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 아닐까. 나는 내가 너무 안타깝고 내 그녀가 너무 안타까워서 조금의 거리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떠한 세계도 구축할 수 없었다.
거리가 생기면 시선이 생기고, 시선이 생기면 이해가, 그리고 존중이 뒤따라온다.
나의 그녀들이 이 세계의 경계에서 웃는다. 귀마개를 벗고 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