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유시민 作
역사라는 것에 처음 눈을 뜬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나이 지긋하신 담임 선생님께서 수업이 지루해지면 옛날이야기 풀어주시듯 고구려의 건국 신화, 신라의 김유신 김춘추 이야기 등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늘 수업 시간이 지루해서 항상 창 밖을 보거나 몰래 몰래 다른 책을 숨어 읽던 나도 눈을 반짝거리면서 빠져서 들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옛날이야기’가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것. 이야기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을 만나는 수 있다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참 신기한 발견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처음 진로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당연히 내 희망은 역사 또는 문학이었다. 돈벌이 되기 힘든 직업을 고르는 게 영 걱정되셨는지 아버지가 한문 공부 엄청 해야 한다고 하도 겁을 주셔서, 또 가족이 이민을 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 길에서 멀어졌지만, 아직도 역사를 사람의 이야기로 알게 해주신 그 선생님의 가르침과 그 때 새로운 세상에 눈뜨면서 가슴 벅찼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렇게 접해왔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조금 더 넓어진 경험은 대학교 겨울 방학 때 한국을 방문하고, 김용옥 선생님의 도올서원 강의를 들으면서였다.
워낙에 달변가이신 선생님께서 한국의 족보사에 대하여 폭넓게 이야기 하시면서 역사를 ‘통시적’ 관점과, ‘동시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차이를 말씀하셨었는데, 한국과 외국 사이에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나에게, 상자 바깥에서, 한국 땅 바깥에서, 내가 알고 있는 역사 바깥에서 역사와 한국인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너무나 시원하고 통쾌했던 기억이 있다.
유시민 작가가 쓰신 ‘역사의 역사’란 책을 읽으면서 계속하여 이 두 가지의 개인적인 경험, 즉 서사로서의 역사의 본질과 그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적 시각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일화가 떠올랐다.
책을 읽기 전엔 막연히 과거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훑어나가는 개요서 같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읽어나갈수록, 이 책은 역사를 대하는 다양한 자세를 설명한 책이고, 그런 다양한 방향과 자세를 알아가면서 내가 역사를 대하고, 역사 속 나를 대하는 Stance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역사’는 첫 역사책이라고 평가받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시작으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까지 다루면서 각 장마다 열다섯 명의 다른 역사가가 각자의 개인적 신념과 시대적 상황과 따라 어떤 시대의 역사를 썼으며 어떤 시점의 역사관을 보여주었는지 안내해주는 책이다.
각 장마다, 기록으로서의 역사, 풍경으로서의 역사, 신념과 투쟁으로서의 역사, 종교이자 사회의 틀인 역사, 탐구로서의 역사, 통찰로서의 역사가 나오고,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시할아버님께서 독립운동가셨고, 그 역사를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올바른 시각으로 가르쳐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있기에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 상고사’를 다룬 장이 흥미로웠다.
또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룬 장을 통해 역사와 우리의 상호작용을 통해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찾는지를 고민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독서 후 찾아본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유시민 작가께서 이 책을 집필하시기로 결심한 동기가 한 때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올바른 역사, 바람직한 역사,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하는지 담론을 시작하고 싶으셨다는 것이다.
어려운 역사와 역사가와 역사책의 설명 사이에서 문득문득 질문을 던지는 유시민 작가님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과거의 나와 앞으로의 나 사이에서 ‘나의 역사’에 대해, 또 ‘내가 나와 우리의 역사를 대하는 시각’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할 수 있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작가는 말했다. 과거의 일을 말하고, 그 과거의 일을 말해준 이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나를 찾고 그 과정을 통해 미래의 내가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 듣는 것, 그럼으로 나아가는 것,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함께 나아가는 것. 한 여름 지루한 수업 속, 11살 아이가 눈을 반짝 거리며 찾아낸 그 새로운 세계의 매력은 그 방대한 ‘함께,여기,있음’의 우주였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