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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Apr 03. 2021

Shape of our times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승효상 作

처음부터 건축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창작을 할 수 있는 삶을 원했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뿐, 그다지 남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늘 기대 이상으로 꼬여버리는 내 길의 행보는 결국 '건축'이라는 방향으로 모아졌고, 나는 창작자로서의 건축, 봉사자로서의 건축, 중재자로서의 건축, 선구자로서의 건축 사이의 경계에서 머뭇거리거나 섣불리 나아가고 후회하곤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의 공간은 급박히 바뀌고 있다.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기존의 틀이 물리적, 사회적 제약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깨어졌고 다시 구축되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건축적, 철학적, 사회적, 경제적 담론들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는 물리적 공간의 변화를 가져오고 결국 개인의 공간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도시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건축가로서 이러한 변화를 최전선에서 실감하고 있는 지난 일 년간, 파편적인 관찰과 상념들이 모이고 쌓여서 결국 마음속의 응어리처럼 남아있었다. 찬찬히 다시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승효상 선생님의 책을 읽는 것은 그러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첫 발걸음이었다. 건축을 ‘인문학’이라고 정의하는 건축가, 건축물의 물物성을 해체하고 건축의 사이, 즉, 길 위에서 생성되는 빈자의 건축에 주목한 건축가, 자신을 경계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을 품고 싶은 구도자로서의 건축가가 말하는 ‘좋은 도시, 좋은 건축, 터무니 있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나는 결국 “아직 모르겠지만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 좋은 건축을 짓겠습니다.”하고 착한 학생처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라는 책은 승효상 선생님이  2014년부터 2015년 동안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에 기고하신 글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건축가 김수근 선생님의 뒤를 잇는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승효상 선생님의 건축 철학은 그의 첫 번째 책’ 빈자의 미학’에서부터 출발한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는 각자 자신 가진 게 적어 많은 부분을 서로 나누며 살 수밖에 없다. 그 나누는 삶이 집 밖의 길에서 이뤄진다. 이곳의 길은 통행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모이고 즐긴다.” 저자가 주목한 이 길 위에서의 건축은,  효율과 용도에 의해 지어지는 조형물로서의 건축이 아닌 ‘보이지 않는’ 건축이다. 보이지 않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태어나고 또 나누어지는 공동체로서의 건축이며, 가난한 이가 아니라 가난 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 열리고 낮아지는 건축이다. 

이러한 그의 건축론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책인 이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는 삶과 이야기를 품은 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 만들어가는 집합체, 도시로서의 모습으로까지 질문을 확장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건축을 만들고 또 건축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직조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름지기 좋은 건축가, 좋은 도시계획가는 땅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이며

좋은 건축, 좋은 도시란 터가 가진 무늬에 새로운 무늬를 덧대어 지난 시절의 무늬와 함께 그 결이 더욱 깊어 가는 곳일 게다. 그게 터무니 있는 건축이며, 그러함으로 터무니 있는 삶이 생겨난다.”


고유한 땅의 무늬를 찾아서 새로운 무늬를 덧대는 것. 그 무늬는 결국 그 땅에, 그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남긴 기억이자 풍경이다.  땅과 하늘과 바람이 조용히 속삭여주는 과거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 그 땅과 하늘 사이에서 바람처럼 살다 갈 사람의 길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내어주는 사람이 건축가가 아닐까.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공간, 서로를 지배하지 않고 속살거리며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움직이는 우리의 도시가 아닐까. 


도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결코 몇 낱 기념비적인 건물이 아니라 그 건물들로 둘러싸인 공공영역이라고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한다. 이러한 공공영역은 솟대가 세워진 동네의 마당 같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품을 수 있는 빈 고요의 공간. 이 또한 보이는 물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쉼의 공간을 품어야만  도시는 그 애환과 열정을 담아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면서 존속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을 맑게 빚는 고요함이 머물 반추의 공간이 없으면 도시는 이내 피로하여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건축을 만든다.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거주인이 새로운 시간을 덧대고 그 기억과 더불어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건축은 기억 속에서 완성되고 기억이 있어야만 영겁의 시간으로부터 살아남는다. 


서로의 삶과 관계를 담아 끊임없이 진화하고 지속되는 공간과 그러한 공간이 모인 유기체적인 도시. 그런 도시는 결국 서로의 기억으로 남아 통합된다. 우리 어린시절의 골목길이, 놀이터가, 학교 운동장이 그렇듯이. 그렇기에 기억이 고일 수 있는 빈터나 길가에 도시의 본질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공간, 그리고 서로의 기억의 공간을 존중할 수 있는 다정한 시선, 개발이 아닌 재생과 생성으로 다가서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날 수 있는 가난한 마음... 그것이 지금 정신없이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한 호흡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불안한 시국에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을 바쁘게 챙기는 모습에서 그 각각의 마음이 이해는 갔지만 동시에  점점 숨이 조여왔었다.  부자의 공간은 점점 커지고 가난한 자들의 공간은 점점 작아지고, 물리적 공간의 제약이 마음의 공간의 단절로 이어져 모두가 서로에게 굳은 벽을 쌓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기력함에 마냥 슬퍼지기만 했던 요즘, 승효상님의 글을 읽는 건 나에게 조용한 기도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 


“또한 기능, 효율, 속도, 결과보다는 관계, 개념, 느림, 과정이 훨씬 중요하고 개발이나 미래보다는 재생이나 현재가 더 귀중하다. 동시다발적이며 연대적이고 개인의 자유가 우선인 곳, 지리적 한계를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로 극복하는 곳이 그가 제안한 메타폴리스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도시에 대한 개념을 뛰어넘는 도시이다. “


메가시티의 개념을 뛰어넘는 인문의 도시, 메타시티를 제안하고 또 그 메타시티라는 장소에 담길 건축의 마음은 위로, 연대, 자아 성찰과 빈자의 미학이라고 말하며 이 책은 여운을 남긴다. 메타시티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요새 한참 담론이 되고 있는 메타버스에 대한 생각으로도 이어졌다. 새로운 가능성과 실험으로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가야할까. 다만 자유가 방종으로 치닺지 않기를. 건축이라는 거울을 통해 바라볼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지만, 연연히 아름답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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