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첫 일행
싸아아아아아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들 사이로 주르륵 뜨뜻한 물이 흘러내린다. 금세 정신없던 머리카락은 차분해진다. 뭉게뭉게 뜨거운 김이 나의 얼굴을 감싸 온다. 어제저녁 정신없었던 여행의 첫걸음이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어제의 스트레스를 조금은 털어버릴 필요가 있다. 정신없는 하루일 때면 종종 이렇게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러고 나면 나는 온몸의 세포가 깨어남이 느껴진다. 고요함 속에서 나를 깨우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에게 집중한다.
나의 의식의 시간, 하루의 시작은 항상 이렇게 나의 내면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시간과 흐르는 물과 함께 나의 부분을 내려놓는 일을 한다.
평상시 우리는 얼마나 자신과 대면하는 일을 할까? 여행에 나선 나에겐 이 의식은 평소 때보다 더욱더 중요해졌다. 하루 그리고 하루, 너무나 많은 정보와 이야기들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내가 다 소화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나와의 대화 시간이 중요하다. 그래야 더 새로운 것을 내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 있다.
새소리가 지저귄다.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바닥에 드리운다. 가방을 열어 내가 좋아하는 찻잎을 꺼냈다. 좋은 향내다, 향긋하고 살짝은 씁쓸한 향내, 내가 대만에서 사 온 찻잎을 조금 챙겨 왔었다. 비록 여행의 시작 부분이지만, 지금부터 먹을 것을 어서 소진해야지 가방도 가벼워지겠지. 스테인 컵에다가 마른 찻잎 몇 가닥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니, 호스텔 공용공간이 금세 향긋한 찻잎 향기로 가득해진다. 후루룩, 한 모금 마시며 소파에 앉아서 오늘 하루 무엇을 할지, 어떤 일이 나에게 준비되어 있는지 잠시간 상상해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찰칵!
갑자기 난 셔터 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어떤 여자가 아침부터 뭐에 그리 신났는지 공용공간에 놓인 러시아 인형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다. 차분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사진을 참 많이도 찍고 있다. 청순해 보이는 까만 머리카락에 맑고 큰 눈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입이 벌어진 채 뭐라고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어였다. 한국을 이제 막 떠나왔는데 벌써 한국 사람을 만났구나. 반갑기보다는 나만의 시간을 좀 방해받은 느낌이랄까나. 하지만, 어제의 그 고생을 해보면 말이 달라진다. 말이 시원시원하게 잘 통하는 사람을 찾았다. 아 이래서 외국에 나오면 같은 한국인이 반가운거군!
그렇게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빵지, 이건 그녀가 빵을 많이 좋아해서 내가 나중에 붙여준 별명이다. 취업준비를 한창하다가 숨구멍 틔우고 싶어서 항상 생각해오던 시베리아 열차를 타려고, 이곳 블라디보스톡에 왔다고 한다. 알고보니 나와 같은 열차여서 당황했지만, 들어보니 같은 열차를 타는 한국인이 두명 더 이 호스텔에 지낸다는 것을 보면서 역시 열차를 타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을 찾는 이들이 많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삼 시베리아 열차의 인기를 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은근 많다는 것을 느끼면서 오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