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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Aug 08. 2024

당신이 만든 결과

"엄마 난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야. 나도 살고싶어"


엄마한테 내가 자해하는 모습을 들킨 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난 이 말을 지금까지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밖에서 돈 때문에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거나 남편이 없다고 무시당하는 일이 생기거나 또는 나로 인해서 무시를 당하는 일이 생기면 그 날 나는 잠도 못자고 엄마의 술주정을 받아주고,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엄마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느낌을 받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와 같이 울어주고 내가 착한 딸이 되겠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내가 커갈수록 점점 더 많아졌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감정표현 방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답답함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더군다나 그 답답함을 엄마한테 말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평, 불만은 많아지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던지 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바라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든 답답함을 풀어야했었다.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술, 담배도 해 보았지만, 엄마 없는 시간에 몰래 집에서 혼자 마셔본 술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쓰디 쓴 알콜 향과 구역질 올라오는 맛 때문에 한 번 해보고 바로 그만 두었고, 담배 또한 목만 아플 뿐 내 답답함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답답함은 커져갔고, 이로 인해 나는 뒤틀린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말도 안되는 일에도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거나 또는 친구들의 조그만한 비난에도 견딜 수 없어했고, 공격적인 성향도 조금씩 보였다. 또한 나는 조그만한 일에도 숨을 못 쉴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고, 이런 성격은 결국 내 학교생활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친구 관계도 서툴렀고 매번 따돌림을 당했다. 나는 따돌림 당했을 때도 엄마한테 이야기를 안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니가 답답하게 굴어서 그래라는 대답이었다. 결국 나는 이 답답함을 풀어야만 내가 정상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답답함을 어떻게 하면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을 했고, 우연치 않게 알게 된 방법은 자해였다. 그건 나에게 또 다른 탈출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이 많은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그 행위를 자주했고 당시 나는 엄마한테 걸리면 안되니 잘 안보이는 내 안쪽 허벅지와 안쪽 팔에 많은 상처들을 남겼다. 죽고 싶어서 자해를 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자해를 하는 그 순간에는 답답함이 풀렸고, 오히려 개운함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나는 점점 대담해졌고 엄마가 없는 시간에 집안에서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일찍 퇴근하고 들어 온 엄마한테 들키게 되었고 그 날 엄마의 비난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니 애비 닮아서 이딴 짓을 하냐!! 니 대가리를 깨서 니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연구해 보고 싶다. 정말! 너까지 나한테 왜그러니 정말?!!! 어?!!!!" 엄마는 나에게 그 자리에서 차라리 죽으라며 나에게 부엌용 식칼을 가져다 줬다. 그러면서 내가 없는게 낫다며 엄마는 나에게 또라이년 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한테 자해를 했다고 재떨이로 맞았다.


그 날 이후 엄마는 내 몸을 검사했지만 그렇다고 내 자해가 쉽게 끝난 건 아니었다. 엄마는 딱 4일간만 내 몸을 검사했다. 바쁜 엄마는 항상 나를 신경써 줄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내 몸을 매일 검사를 못하는 대신 주말마다 나를 데리고 목욕탕을 갔다. 그러면 엄마는 내 몸을 볼 수 있었고 내가 자해를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자해를 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엄마가 주말에 나를 데리고 목욕탕을 가니 엄마한테 흉터를 안들키기 위해서 오히려 대담하게 일요일에 엄마와 목욕탕을 다녀온 후에 엄마가 잘 때 방에서 혼자 자해를 시도했다. 하지만 매일 했던 자해를 뜨문뜨문 해야하니 더 답답함이 쌓여갔다. 그러던 중 내가 우연치 않게 오토바이랑 사고가 났고 크게는 아니지만 나는 꽤나 다쳤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엄마한테 사랑을 느낌과 동시에 답답함도 같이 풀렸다. 유레카! 아, 자해를 하면 답답함만 풀리는데 사고가 나거나 다치면 엄마한테 관심도 받고 사랑도 느끼고 또 답답함도 풀리는구나, 더군다나 혼나지도 않구나를 깨달았다. 그 뒤부터 나는 일부러 다쳤다. 일부러 엄마랑 걸어갈 때 넘어지고 에스컬레이터, 육교 등에서 구른 적도 있었다.


처음에 가벼운 상처만을 남겼던 나의 타박상은 결국, 병원 입원까지 이르게 되었고, 점점 심해져서 2번의 자살 시도까지 이르렀고, 나는 무언가 고장 난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그리고 내가 나중에 심리치료를 받으면서도 언급 했던 것은, 난 당시에 엄마가 나를 안아주길 바랬다. 내 답답함을 알아주길 바랬다. 나는 엄마가 남들한테 말하는 정말로 소중한 하나밖에 없는 딸이 되고 싶은 것뿐이었다. 나도 당시 자해를 하는 내가 싫었다. 자해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한테 미안해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나는 자해를 하면서도 내 몸에 미안해 하는게 아니라 엄마한테 미안해했다. 나는 내 몸인데도 나한테 미안해했던 적이 없었다. 엄마한테 자해를 해서 혼날 때도, 엄마가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러냐면서 비난을 할 때도, 나는 엄마한테 죄송하다고 했지 상처 입은 내 스스로한테 미안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그날의 일은 그리고 그 이후에 내 몸을 검사하는 일은 엄마한테 큰 상처라고 했고, 너는 나한테 아주 큰 불효를 한 거라고 종종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건 엄마가 만든 결과였고 이 과정 속에서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마음의 상처는 봐주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다른 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나한테 이해를 바랬듯 나도 엄마가 나를 이해해주고 안아주길 바랬다. 왜 엄마는 우리는 서로 우리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고장난 나는 안봐줬는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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